브런치북 장미상회 09화

아카시아 따러 가자

무명의 기록집

by 나비란

땅거미가 내려앉은 산은 금방 어둠이 찾아온다.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와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은 숲을 어지럽게 만든다.
모두가 같아지는 풍경 앞에 삼켜지면 나조차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밤길에 산을 오르면 나는 짐승이 된다. 귀를 세우고 코를 흠흠거린다. 그리고 날카롭게 울 준비를 한다. 눈먼 내가 길을 찾는 유일한 방법은 소리를 내거나, 더듬는 것뿐이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잘못했어요.”

산에 오르자는 말은 늘 달랐지만, 매번 속았다.

“밤산책 가자, 약수터 가자, 배드민턴 치러 가자.”


아카시아 꽃향기가 눈에 보이던 5월 어느 날, 나는 나무에 묶였다.


처음에는 울었다.
두 번째는 잘못을 빌었다.
세 번째는 눈치를 봤고,
네 번째는 조금 웃었다.


이 정도 했으면 그만할 법도 하지만, 부모님은 지칠 줄 몰랐다.


그날도 어김없이 동생과 나를 꾀어내어 산을 오르게 한 부모님은 또 똑같은 나무에 우리를 묶었다.
벌써 다섯 번째 인질이 된 나무와 동생과 나는 끈에 휘감겼다.

하지만 이제 매듭을 묶고 푸는 것이 귀찮아진 아빠가 끈을 잡고 서 있으라고 했다.
수풀에 숨은 엄마와 아빠가 키득키득 웃었다.

나무와 동생과 나도 따라 웃었다. 큭큭.

산을 내려갈 때면 손전등 불빛은 늘 신발 앞 코에 걸렸다.

아이스크림을 사준다, 안 사준다, 사준다, 안 사준다.

아빠가 따준 아카시아 잎을 한 장 한 장 떼어내며 늦은 봄을 보내고 여름을 재촉하며 걸었던 그날은 단내가 가득했다.

“이렇게 깜깜한 밤, 나무에 묶여본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거야. 그것도 엄마 아빠한테.”

동생과 나는 우리의 부모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가끔 그들에게 들려준다.
엄마와 아빠는 정말 시시한 어른이 아니었기에.


나는 이제부터 젊었던 나의 부모와 어렸던 우리만 알고 있는 이야기를 꺼내어 숨어있는 나의 내면 아이를 찾아보려 한다. 느닷없이 사라진 그 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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