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기록집
언젠가 한 번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자주 만나는지 알고 싶었다. 인은 항상 휴대전화 달력에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을 남겨 놓았기 때문에 그녀의 기록을 세어보면 한 해 동안 우리가 만난 횟수를 알 수 있었다. 하나, 둘, 셋 … 수를 세어보던 인이 말했다.
“야, 안 만난 날짜를 세는 게 더 빠르겠다.”
그러더니 인은 달력에 표시하지 않은 날을 골라 다시 세어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이 말했다.
“이백팔십사일……?”
일 년 중 고작 80여 일을 빼고 우리는 매일 서로의 얼굴을 본 셈이었다. 우린 서로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미쳤네. 미쳤어.
그러다가 문득, 우리가 오랜 시간을 함께 했지만 둘이 ‘여행’이라는 그것을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인과 나는 참을성이 없다. 고민하고 망설이기보다 일단 해보고 안 되면 말자를 택하는 주의였다. 기다림을 싫어하는 우리는 바로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장소는 제주도로 골랐다. 둘 다 영어는 안되고, 인은 그때까지 제주도를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내에서 나름 멀리 떠날 수 있는 곳으로 제주를 택했다. 일주일은 너무 긴 것 같고, 삼사일은 너무 짧게 느껴져서 5박6일의 제주도행 여행을 계획했다. 그러나 우리가 계획한 것은 왕복 비행기티켓, 그뿐이었다. 그것도 아시아나로.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이나 기이한 행동인데, 그 당시 목숨이 소중하다며 저가 항공은 타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아이러니하게 우리가 제주에서 묵었던 숙박시설은 모두 모텔과 민박집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람에 대한 불신보다 비행기에 대한 불신이 더 컸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명이 길다는 게 지금의 우리가 내린 결론이다. 비행기 티켓값에만 몇십을 태웠는데도 생각보다 우리에겐 돈이 많이 남아있었다. 아주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면서 돈이 여유로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들의 여행은 그렇게 갑자기 시작되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고 우린 각자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무사히 잘 도착했으니 이제 나의 여행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는 통화를 마친 후 가방에 휴대전화를 넣었다. 그러고는 공항에서 챙겨온 제주 관광안내서를 펼쳤다. 당시 우리는 면허가 없었기 때문에 버스와 택시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공항에서 받아온 안내서에는 친절하게 버스 노선도 안내 되어있었다. 드디어 한라산을 가운데 둔 지도를 펼쳐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야 할 때가 왔다. 하지만 눈앞에 버스가 멈췄을 때 우리는 마치 기다렸던 버스가 왔다는 듯 자연스럽게 버스에 올랐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를 갈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버스를 타고 나서 정하면 될 일이었다. 우리는 버스의 행선지를 따라 시계방향으로 공항을 벗어났다.
한림공원을 기억하는 것은 한두 장의 사진 때문이다. 이색적인 나무를 보며 제주에 왔다는 것을 실감하는 건 제주공항으로 충분했다. 꽃나무를 추억으로 담기에는 스물하나인 우리는 너무 젊었다. 그래서 한림공원이라는 문구가 적힌 선인장 그림과 두 명의 해녀가 그려진 포토 존 만이 우리를 가장 즐겁게 했다. 찍히는 사람도, 찍어주는 사람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기억이 지금 떠올려도 뱃속을 간질인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포토 존마다 고개를 들이밀었던 천진난만함이 지금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여행하다가 또래의 여자애들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녀들을 보며 뒷담화했다. 더워서 죽을 것 같은 날씨에 풀메이크업을 하고, 치렁치렁한 불편한 옷을 입고, 힐을 신으며 캐리어를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훗날 그녀들이 참 현명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우리의 몰골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이의 모습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여행용 보스턴 가방에 5박6일 짐을 챙겨서 제주의 여기저기를 장돌뱅이처럼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진을 남겼다. 하지만 우리 둘만을 제외하고 제주의 사진을 본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우린 너무 구렸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우리의 꼬락서니를 보고 측은하게 생각한 택시 기사님이 일일 여행 가이드를 자칭했다. 덕분에 도깨비 도로도 가고, 당시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았던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제주돌문화공원도 가고, 비자림 숲도 다녀왔다. 그것도 기사님의 딸 신분으로. 이날 이후 우리는 요령이 생겨서 제주의 주요 관광지를 무료, 혹은 도민할인을 받으며 다녔다. 하지만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우리가 섬까지 가서 회를 먹지 않았던 이유는 날음식을 좋아하지 않은 나를 위한 인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 마지막 날 용두암 근처에 가서 해녀가 파는 해산물은 꼭 먹기로 했다. 그것은 일종의 제주 로망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망이 실현되기도 전에 우리는 회를 먹게 되었다. 그것도 무려 자연산 회를.
그날은 바닷가 앞에 있는 민박집에 짐을 풀었다. 깨끗하고 넓은 방과는 달리 온수가 나오지 않는 방이었다. 찬물로 씻지 못하는 우리는 각자 씻을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8월 말 제주의 밤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샤워 후 몸이 차갑게 식은 덕분에 다시 밖에 나갈 용기가 생겼다. 맥주 몇 캔과 과자를 사서 바닷가 모래 위를 걸었다. 모래사장에는 몇몇 젊은 남녀들이 돗자리를 펴고 함께 술을 마시며 여름밤을 즐기고 있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우리에게도 청춘의 기회는 찾아왔다. 숫기가 없어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쭈뼛쭈뼛하게 다가오더니 우리에게 돗자리 합석을 요청한 것이었다. 술 봉지를 휘두르며 할일 없이 돌아다니는 우리에게 제주는 참 따뜻한 곳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호의를 봤다. 그리고 포장된 회와 한라산을 봤다. 그래서 잠시 망설이는 척을 하다가 합석했다. 그들은 우리보다 한 살 많았다. 한 명은 제주도민이었고, 한 명은 제주도민 친구를 만나러 온 육지인이었다. 당시 인과 나는 술로 살크업이 된 상태였다. 식성도 좋았지만, 주량도 꽤 올라와 있었고 무엇보다 성인이 된 후 술 게임으로 다져진 몸이었다. 인과 함께한 이백팔십사 일의 시간은 아마도 이날을 위한 단련의 시간이었을지도 몰랐다. 우리는 그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함께 술을 마시며 게임을 했다. 정정당당하게 했지만 피지컬이 좋았던 우리는 그들을 계속 이겼고, 안타깝게도 그들은 계속 벌칙을 받았다.
저기 멀리 세워져 있는 기둥 찍고 오세요.
쪼그려 앉아 걸어서 다녀오세요.
코끼리 코해서 다섯 바퀴 돌고 다녀오세요.
제주도민과 육지인이 모래사장과 돗자리 사이를 열심히 오갔다. 그러는 동안 우리 둘은 술을 마셨다. 우리는 그들을 자꾸 멀리 보내고 회를 안주삼아 배를 채웠다. 그들은 정말 지지리도 게임을 못했다. 마지막 벌칙은 낮은 포복이었다. 그들은 볼멘소리 하면서도 성실히 모래 위를 기며 벌칙을 수행했다. 참 순진한 사람들이었다. 회가 거의 바닥이 났을 때쯤 우리는 이만 들어가서 자야겠다며 돗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내가 아쉬워했지만, 우리를 붙잡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도 아마 아쉬워하는 척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인이 잊었던 그들을 떠올리며 내게 물었다.
“걔들 기억 속에도 우리가 있을까?”
“있겠지, 거지년들로.”
인과 내가 기념품 가게에서 주문한 귤이 우리보다 먼저 집에 도착했다. 아빠는 귤이 잘 도착했다는 말과 함께 언제 돌아올지 물었다. 처음부터 집에 돌아갈 날은 정해져 있었지만, 부모님께는 미리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방랑자의 모습에 심취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는 입고 있는 옷 그대로 바다에 뛰어 들어갔다. 수건 한 장, 여벌 옷 한 벌도 챙기지 않았던 우리가 바다에 들어간 이유는 단순했다. 더운데 물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인과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내내 서있어야 했다. 바다의 비린내와 흘러내리는 물을 잠시 모른 척하며.
여행 마지막 날 우린 숙소 근처에서 백반 정식을 먹고 용머리 해안으로 이동했다. 공항 가는 동선과 맞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제주 로망 중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해녀가 파는 해삼과 멍게와 맥주를 마셨다. 제주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축배의 의미였다. 하지만 여행의 끝은 그곳이 아니었다.
우습게도 우리는 여행 첫날부터 제주 음식이 아니라 피자가 먹고 싶었는데, 마땅한 피자집을 찾지 못해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공항 가는 길에 우연히 그토록 먹고 싶었던 피자가게의 간판을 보게 되었다. 우리는 홀린 듯 달리는 버스의 버저를 눌러 버스를 멈춰 세웠다. 모르는 길이었지만 헤매지 않고 오두막을 찾았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피자 오두막을! 그곳에서 우리는 망설임 없이 피자 한판을 주문했다. 치즈로만 토핑이 된 패밀리 사이즈의 피자가 나왔다. 15인치 피자가 10분도 안 돼서 사라졌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직원을 불러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다 먹은 판은 빨리 치워주세요. 그리고 같은 피자 하나 더 주세요.”
뜨거웠던 8월, 여름방학을 끝낸 나는 10kg의 추억이 살쪄 있었다. 누군가의 기억에는 거지 년일 테지만, 치기 어린 스물하나의 우리 모습이 나는 너무 좋았다. 그 추억을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인이 있어서 정말 고맙다. 마흔이 가까워진 인과 나는 제주에서 찍었던 사진을 모두 날려 먹었다. 그 한결같은 한심스러움도 너무나 우리 같아서 그마저도 마음에 든다. 그래서 또 다른 여름방학이 기다려진다. 그때도 과식할 예정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