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장미상회 08화

무명의 기록집

by 나비란

“엄마,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하루만 더 버텨주면 안 될까…….”

고모는 그렇게 할머니의 삶을 간섭했다. 그리고 다음 날 할머니의 시간이 멈췄다.
할아버지와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던 할머니는 4남 1녀를 낳았고, 할아버지와 같은 날 돌아가셨다.
고모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은 할머니 덕분에 이제 제삿밥은 한상에 오를 수 있었다. 고명딸의 마지막 바람이 씁쓸하게 이루어졌다.


볏짚으로 만들어진 긴 멍석이 깔렸다. 멍석에는 말판이 그려져 있다. “깍정이”라 부르는 종지 안에,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나무 윷 4개가 담겼다.
윷놀음이 시작되고, 조문객들은 노름꾼이 되었다. 생을 잃은 사람의 소리를 듣기 위함일까. 윷가락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따금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면 노름꾼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깍정이를 힘껏 들어 올렸다.


“드시면서 하세요.”


멍석 앞 사람들을 불러 모아 따뜻한 국과 밥을 내놓았다. 그들은 술잔을 채우고 기울였지만, 잔을 부딪치지는 않았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여든아홉을 사신 할머니의 죽음을 호상이라 불렀기에, 가족들은 몰래몰래 울고 때때로 웃었다.
사람들이 물러난 깊은 밤 우리는 서로 안부를 묻고 농담을 나눴다.
마치 반가움과 어색함이 섞인 명절날의 모습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향이 꺼지지 않도록 불침번을 섰고, 누군가는 배를 굶기지 않게 끼니를 챙겼다.
슬프지만 괴롭지 않은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할머니의 죽음에는 몇 번의 예고가 있었다.
덕분에 노란 옷을 입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 속 할머니는 유독 젊은 얼굴을 하고 있다.
꽃에 둘러싸인 할머니를 보다가, 그녀가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에겐 해를 거르지 않고 11명의 손주가 생겨났다.
그중 나는 다섯 번째 손주로 언제나 내 몫은 크지 않았다.
그녀는 공평했기에, 정도 추억도 나눌 것이 많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하필이면 스물여섯 우울의 끝자락에 선 내 곁에 오게 되었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내가 그녀의 끼니와 안녕을 챙겼다.
그래서 나는 더욱 깊이 우울해졌다.
죽음에 가까운 무기력함이 나를 자꾸 아래로 끌어내렸다.

우리는 서로를 챙기고 보살필 줄 몰랐고, 둘만 남은 집에선 웃지 않았다. 우린 나눌 말이 없었다.

몇 주 만에 그녀를 두고 외출했던 날,
그녀는 식사도 거른 채 불 꺼진 거실에 앉아 TV만 보고 있었다.
분명 그녀의 집에서는 간단하게 음식도 해 먹고, 밭일도 나가고, 마실도 나갔다고 들었다.
한데 홀로 남은 집에서 그녀는 마른나무가 되어 우두커니 하루 종일 빛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는 몇 주를 더 머물다 아버지의 다른 형제 집으로 가셨다.

나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지만, 그날 이후 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계속 시큰거렸다.


입관식 전, 할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가족들이 검은 줄을 그리며 할머니가 계시는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철판 위 흰색 천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할머니가 얼굴만 내민 채 누워 있었다.
모두가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할머니를 둥글게 에워쌌다.

아버지는 길 잃은 아이가 되어 엄마를 찾았다.
할머니의 몸은 아버지가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감싸져 있었지만, 아버지는 자꾸 품을 파고들었다.
가까이 있지만 큰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가족들은 저마다 할머니를 향해 한마디씩 남겼다.
눈물과 인사가 출렁였다.

내 차례가 되었다.
천으로 감싸진 손을 잡고 할머니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할머니의 새하얀 뺨이 닿았다.
할머니의 귓가에 속마음을 내뱉었다.

‘할머니, 그때 미안했어요….’


그러자 ‘괜찮다’라는 할머니의 음성이 내게 닿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미웠다.

검은 슬픔이 새어 나와 노름꾼 귀에 닿았다.
더욱 큰 윷판이 벌어졌다.
우리를 달래는 거센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가족들은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모호한 상실을 끝냈다.

어른들은 갑작스러운 배고픔에 외로워지지 않게 분주히 상을 차렸다.
할머니가 차려주신 마지막 상에서, 할머니의 손주 중 다섯 명이 홍어를 배웠다.
그때 먹은 음식들은 유난히 맛이 좋았다.

이맘때면 할머니가 떠오른다.
윷판의 기억과 상 때문일까.
아니면 냄새만 맡아도 역했던 홍어를 처음으로 배웠기 때문일까.
나눌 것 없던 우리가, 서로 나눌 말이 생겼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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