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장미상회 07화

그놈의 정의란 무엇이기에

무명의 기록집

by 나비란

확증 편향, 어떤 말을 이해하거나 사용할 때, 오로지 내가 아는 의미 범주로만 그 말을 이해하려 하고, 그 뜻을 믿으려 하는 태도.


<짐작>을 읽고 중학교 1학년 때 아빠와 사전을 두고 입씨름한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학원에서 ‘정의’에 대해 배우고 집에 들어왔다. 선생님은 말했다. ‘정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내가 익힌 배움은 ‘그런 정의’였다. 하지만 아빠는 내게 ‘다른 정의’를 알려주었고, 나는 아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선생님이 아빠보다 더 배운 사람이었기에, 혹은 선·생·님이었기에 그를 더 신뢰하고 따랐다.


아빠가 왜 내게 묻지도 않은, 듣고 싶지도 않은 ‘다른 정의’에 대해서 말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자꾸 불량한 마음이 들고, 반항심이 생겼다. 내가 아빠의 말을 인정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자, 아빠는 평소 장롱 위에나 올려놓았던 먼지 쌓인 국어 대사전을 꺼내 내게 수많은 정의를 보여줬다.


세상에는 ‘정의’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아빠가 펼친 국어대사전 속 정의를 보고도 아빠를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배워온 정의가 틀렸다고 말하는 아빠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 또한 수많은 정의 중 하나인 나의 정의를 인정하고 넘어가주면 되는데, 자꾸만 나를 다그쳤다. 아빠는 아빠에게 대항하는, 머리 굵어진 딸에게 질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나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꾸 의미 없는 싸움이 길어졌다.


정의를 찾은 다음에 실랑이를 벌였던 말은 범주였다. 우린 목소릴 높여 바보 같은 논쟁을 계속했다. 결국 그 싸움에서 나는 졌다. 아빠에겐 어른의 권력이 있었으니까.


사실 이 말도 안 되는 싸움판에서 승자는 누가 있겠냐 싶지만, 우리는 이런 우스운 싸움을 자주 벌었다. 우리 둘은 모두 성숙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자꾸 서로에게 이기고 싶었다. 그리고 듣고 싶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필사했던 어느 명언 집에서 읽었던 글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전쟁은 서로의 ‘정의’를 위해 싸운다.” 누가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기막힌 명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도 ‘정의’ 때문에 싸웠구나. 그놈의 정의란 무엇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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