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기록집
중학교 3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여름방학이 올 때까지, 교실에서는 무료한 수업이 계속됐다. 달달거리던 선풍기는 고개를 계속 휘저었고, 언제 빨았는지 모를 커튼도 눅눅해졌다. 하얀색 교복 상의는 땀에 들러붙어 몸을 조여왔고, 푸르고 시큼한 여름 냄새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간간이 시끄럽게 울던 매미도 짝을 찾았는지 이상하게 조용한 날이었다.
5교시 체육은 교실에서 수업했다. 이번 학기에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는 선생님이 TV를 틀어 영상으로 수업을 대신했다. 2학기에 배울 내용이라고 했지만 이미 1학기 때 배운 내용이었다. 40대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검은색 운동복을 입고 시범을 보였다. 익숙한 성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 소리를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점심을 먹고 나른한 건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교실의 많은 친구들이 선생님과 함께 잠들었다. 수업이 시작한 지 15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때 나의 단짝 수영이가 내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을 깨울 용기는 없었다. 수영이와 나는 교실 뒷문을 몰래 열고 나와 화장실로 갔다. 선생님을 깨울 용기가 없어도, 함께 도망갈 의리는 존재하던 나이였다.
친구가 볼일을 보는 동안 나는 교복에 흘린 반찬 국물 얼룩을 지웠다. 말라서 갈라진 초록색 비누로는 얼룩의 경계를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교복 상의 밑단이 축축해져 비틀어 짤 때, 화장실 문이 열렸다. 같은 반 친구 은주와 혜정이가 들어왔다.
“야, 너희 뭐야?”
“너네도 화장실 왔어?”
“선생님은?”
“아직도 자.”
“너네도 몰래 나온 거야?”
“아, 어.”
화장실이 급했던 친구 둘, 의리가 넘쳤던 친구 둘이 모두 거울 앞에 서서 함께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쾅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우리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벽에 고정된 생리대 자판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모두 당황했다.
“하필 몰래 나와 있을 때 자판기가 떨어질게 뭐람.”
“일단 다른 애들 못 들어오게 문 먼저 잠그자.”
“걸려 있던 게 떨어진 것 같은데, 넣어보자.”
“그래, 일단 들어보자.”
자판기를 살짝 들어 올리는 순간, 또르르 동전이 바닥을 굴러 나왔다. 자판기가 떨어지면서 투입구 속에 있던 돈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상품 나오는 곳에는 생리대와 미니 티슈가 걸려 있었다.
“와, 이게 뭐야.”
“몰라, 일단 챙기자.”
우리는 자판기를 들다 말고 다시 벽에 기대 세웠다. 자판기보다 돈 줍는 일이 우선이었다. 생리대 2개, 미니 티슈 1개, 그리고 3천 원이 생겼다는 사실이 우리를 들뜨게 했다. 생리대 2개는 은주가 갖기로 하고, 나는 휴지를 챙겼다. 그리고 3천 원을 어떻게 할지 논의했다.
하필이면 학교 주변에는 새로 문을 연 분식집이 있었다. 교문을 나와 5분 거리로, 담장 너머로 주문이 가능한 가까운 곳이었다. 우리들에겐 시간이 없었고, 담을 넘을 이유는 충분했다. 서둘러 넷이 힘을 모아 자판기를 들어 벽에 달아 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자판기가 원래 있던 것처럼 제자리를 찾았다.
우리는 수업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학교 건물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회색 철제 담장은 분식집 쪽을 향해 우리를 이끌었다. 우리는 분식집 앞에서 외쳤다.
“아줌마, 떡볶이 3천 원어치 주세요!”
“아니, 너희 뭐야?”
“저희가 거기로 갈게요, 지금 퍼주세요.”
“너희 수업 시간 아니니?”
“아니에요, 지금 주세요.”
보란 듯이 담장을 넘어가라는 듯, 담장 옆에는 검은색 쓰레기봉투가 디딤돌처럼 놓여있었다. 마치 우리에게 떡볶이를 먹이기 위해 누군가가 일부러 그곳에 쌓아 둔 것처럼 우리는 그 쓰레기봉투를 밟고 담을 넘어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분식집 아줌마가 미리 퍼놓은 떡볶이 한 접시를 마주 보며 우리 넷은 앉을 새도 없이 입안에 떡볶이를 욱여넣었다.
허겁지겁 먹고 있는 우리에게 아줌마는 "너희 땡땡이지?" 라는 말과 함께 물병과 종이컵을 주었지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종이 울리기 전 우리는 교실에 들어가야 했다. 친구들에게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아직 선생님은 잠에 빠져있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들은 빠르게 떡볶이를 먹어 치운 후 값을 지불했다. 아줌마는 동전을 보며 살짝 당황하셨다. 아줌마는 그 돈을 우리들의 코 묻은 돈이라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를 담장 앞에 놔 주신 아줌마 덕에 우리들은 의자를 밟고 담장을 넘어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교실은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체육 선생님은 깨어있었다. 언제 일어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뒷문을 열고 슬쩍 들어오던 우리들은 그대로 선생님께 들켜서 교실 뒷자리에 서 있게 되었다.
"넷이서 어딜 갔니?"
"화장실이요..."
고추장과 밀떡 냄새가 선생님의 코에 닿을지라, 우리들은 모두 고개를 푹 숙이며 반성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때마침 종이 울렸다. 선생님은 한 번만 더 허락도 없이 화장실을 가면 교무실로 데리고 가겠다는 말씀하신 후 교실을 떠났다. 그날은 운이 참 좋은 날 이었다.
그 후 우리들은 친구들이 이용하지 않은 시간을 틈타 종종 화장실 문을 잠갔다. 그때마다 우리에게는 얼마의 돈과 몇 개의 생리대와 휴지가 생겼다. 우리 넷이 모이면 우리들은 어설프게 배운 경제학자의 이름을 들먹거렸다. 우리들은 ‘애덤 스미스(Adam Smith)’다. 동부여자중학교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어느 화창한 봄날, 우연히 길을 나서다 예쁜 꽃을 만났다. 꽃을 보며 너무 행복했다. 그래서 다음날 다시 그 꽃을 찾았다. 하지만 꽃은 지고 없었다. 우리들의 비행도 그 계절과 같았다. 여름방학을 보낸 후 우리들의 저금통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새로운 생리대 자판기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꽃놀이를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