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장미상회 03화

381-7호

무명의 기록집

by 나비란

볕이 귀했던 381-7호.

그 집의 기억은 철창으로 시작된다. 지금은 보기 힘든 마름모 모양의 창살은 진녹색 페인트로 칠해졌다. 흘러내리게 칠한 페인트 때문에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은 대문. 애정은 있지만 재주가 없던 집주인은 낡은 집을 숨기지 못했다.


여름이 지나면 작은방 창 밑에는 수묵화가 걸렸다. 세로줄로 길게 내려앉은 얼룩은 장판에 닿아 쿰쿰한 냄새를 풍겼다. 긴 비가 오면 어김없이 배수구는 막혔고 물이 넘쳐 들어왔다. 그 후엔 검은 꽃이 피었다. 매년 꽃을 피우기 위해 즐거운 나의 집은 그렇게 물을 잡아당겼다.

지난해에 없던 나팔꽃은 벗겨진 페인트를 숨기며 덩굴을 뻗었고 꽃은 빛을 담았다. 남은 빛이 창살에 잘린 채 집에 들어왔다. 하지만 조각난 볕에도 온기는 돌았다.


‘가난한 모습인데, 왜 기억은 배가 부른 걸까?’

나는 늘 궁금했다.


어느 날 붉은 벽돌 담벼락을 따라 미장이 덜 된 벽면에 내 이름이 적혔다. 다세대주택 지하 1층에 살고 있는 서명식씨의 장녀 이름은 그렇게 문패처럼 달렸다. 누군가 하늘색 분필을 들고 계속해서 집을 찾았다. 오랜 시간 나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고 빛났다.

그래서였을까? 나의 이름이 즐거움의 첫술이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안방에 있던 큰 어항이 동네 꼬마들이 던진 돌에 우연히 깨졌다.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고, 나는 기분이 좋아 몰래 웃었다. 걸레질하는 엄마 옆에서 세숫대야에 수초와 자갈을 바쁘게 옮겨 담았지만, 자랑할 생각에 마음속은 더 바빴다. 파닥거리는 붕어를 보며 철없던 나는 월척을 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를 달변가로 만들어 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현관문 앞 하수구에 쥐 소리가 들렸다. 주전자에 물을 끓이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나는 그 일을 완수했고, 하수구에 끓는 물이 흘러 들어갔다. 가늘고 얇은 쥐들의 비명이 들렸다.

그래서였을까? 쥐를 물리친 영웅담을 하루 종일 떠들어 댔던 수다스러운 아이는 “나는 참새입니다.”를 열 번 쓴 알림장을 가져왔다.


철창은 하나의 삶으로 나를 가두지 않았다. 집주인이 되었다가 강태공이 되었다. 어느 날은 피리 부는 사나이도, 참새도 되었다. 애지중지 키운 삶에 나도 마음을 맞췄다. 그래서 381-7호 나의 집에 꽃이 피었다.
매일 새로운 삶을 낳았더니, 꽃대가 올라오고 망울이 맺혔다.
배부른 꽃봉오리가 오늘도 고개를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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