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은 암살과 위협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왕의 이야기다. 왕을 보좌하는 측근인 상책(정재영)은 밤낮으로 그의 안위를 걱정한다. 반면 정순왕후(한지민)는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며 정조의 숨통을 조이는데, 조선 최고의 살수(조정석)를 찾아 암살 계획을 세운다.
부모를 잃고 살수로 키워진 상책은 어린 시절부터 정조의 곁을 지킨 인물이다. 양부의 도구가 되어 살아온 그이지만, 정조의 성품에 반해마음을 돌린다. 또한 세답방 나인 월혜(정은채)는암살 정보책으로 이용당하지만, 어린 나인의 희생을보며양부의 지시를 거부한다. 상책과 월혜는자신이권력 창탈의 부산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왕의 암살을 막는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 중용 23장, 상책의 대사 -
왕은 상책에게자신을 진심으로 대한 것이 언제부터냐고 묻는다. 세자 시절부터 상처와 아픔을 위로하면서, 친구로서 서로를 헤아렸다. 왕의 어진 마음이 상책의 마음을 바꾸고, 상책의 정성이 왕의 마음을 물들인 것이다. 결국왕은 자신을 죽이려 한 노론 세력을용서하며 아군으로 만든다. 모든 일에 정성을 들이면 감동하게 되고,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중용의 가르침을 따랐다.
영화는 권력층의 비리를고발하는 동시에,지배층이 가져야 할덕목을제시한다.이데올로기를 위해희생당하는 인물을 그리며,신의와사랑, 우정을 통해 ‘정성과 진심’의 의미를 되새긴다.<역린>을 역사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바로 이 지점에 있다. 위협과 배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묻는다. 개인의 몰락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그 가능성에대해 말한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지젝은<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이데올로기를 단순히 ‘허위의식’이 아닌 현실을 구성하는 ‘비지식(알지 못함)’으로 정의한다. 동시에 사회 구성원이 알지 못하는것보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데올로기는 내부의 문제라기보다 외부의 문제로 보아야할 것이며, 우리는 상징계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그허구성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사상이나 의식체계를 말한다. 흔히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 보고, 실제 현실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이해하지만 실상은 아니다. 현실은 상징과 구조적 틀에 의해 유지되고, 인간이 누리는 자유 또한 사회 체계에 의해 이루어진다.그렇기에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충분히 누리기 위해서 누군가의 노예가 된다는 현실을 인지해야 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결여와 모순점을 안고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오인하는 것은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야 한다.실상을 외면한 채 이데올로기라는 가상의 현실을 두고, 완벽한 것이라 믿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달아야한다.
<역린>에서 부모를 잃은 갑수와 을수는 각각 상책과 살수라는 기표를 단다. 갑수는 정조를 모시는 상책이 되고, 을수는 조선 최고의 살수로 훈련받는다. 그들은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고, 행복과 자유를 보장받을 것이라 믿는다. 안타깝게도그들은 누군가의 도구로존재할 뿐이다.결국에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에 가려진 중핵을 ‘알아채지 못하고’, ‘혹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르며 살아간다.그러나 상책은 ‘왕의 독살 사건’으로 인해큰 변화를일으킨다. 왕을 살리기 위해 정치적 시스템에 제동을 걸고, 조직의 도구가 되기를 포기한다.
나는 ‘이데올로기 사회에서의 개인의 위치’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 관한 지젝의 논의에 생각을 보태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독자들에게 집단적 체계와 규범 안에서 권리를 보장받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써 위치해 있지 않은지의문을 제기하고 싶었다.또한그 안에 자유와 평등에 대한 성찰이 이뤄지고 있는지도 묻고 싶었다. 덧붙여 주체의 결단이 스스로를 좀 더 윤택하게 만든다는 것, 권리와 자유는 사회 개혁에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역린>은이데올로기 현실과 마주할 기회를 제공하고, 철학적 가르침을 전하는 영화다. 또한화려한액션과 독특한 미장센이 흥미와 재미를 더한다. 다만회상 신을 자주 노출하면서,다소 설명적인느낌을 준다. 극의 개연성을 보다 집약적으로 이끌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