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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도모 Sep 01. 2021

비가 오는 날은 조금씩 느리게 움직이는 것도 괜찮습니다

우산을 들고 나섰다. 내내 펴질 일이 없던 우산은 퇴근시간이 되어서야 펴졌다. 집에 가는 버스는 늘 가는 시간보다 30분은 느려졌다. 비가 오는 세상을 뚫고 간다는 건 시간을 조금 더 느리게 산다는 얘기다. 어제도 갔던 길이 더 길어진다.


맞벌이 부부의 저녁 메뉴 고르기는 언제나 같은 패턴이다. 우리의 경우는 늘 먹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한 사람의 의견을 따른다. 오늘은 다행히 먹고 싶은 메뉴가 분명했다. 옛날 통닭 한 마리를 사 오고 짜파게티 2봉을 끓여서 먹는 동안에도 같이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 동안에도 비는 계속 그렇게 내렸다. 밖과 달리 시간은 어제와 같은 만큼 흐르고 있었다.


김민섭 작가의 책을 한 권 읽었다. 글을 쓰고자 했는데, 그 핑계로 글을 읽기만 하고 있다. 환전을 좀 했다. 그냥 환전이 좀 하고 싶었다. 어제보다는 회사에서의 일이 조금 더 진전되었다고 생각하면서 기분이 좋았다가, 퇴근 직전에 모든 것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기억을 잊기로 했다. 비도 오니까 그 기분이 회사에서 출발해 우리 집까지 오는데 오늘은 시간이 많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이지 무엇이라도 쓰자고 마음먹고 쓰는 지금에서야 회사에서 있었던 그 생각이 온 걸 알았다. 비 덕분에 늦었지만 그만큼 불쾌했던 그 기분은 빗물에 다 씻겨간 모양이었다. 회사 일이야 뭐 늘 그런 일의 연속이니까. 내일은 또 일이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 나쁜 일이 있었으니 좋은 일도 있겠지.


생각해보면 나는 예전부터 이상한 관념이 하나 있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의 총량이 동일하게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새옹지마와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아침에 뭔가 좋은 일이 생기면 ‘오늘은 조심해야겠다.’라고 먼저 생각한다. 반대로 나쁜 일이 생기면 (예를 들어 문지방에 엄지발가락을 부딪히는 정도의 일이라도) 그날 하루는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30대 중반이 지나 나를 돌아보면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 살아온 내가 안쓰럽다. 늘 단단하게 무슨 일이 있어도 견딜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좋은 일을 그저 아이의 마음으로 좋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마음껏 행복해하지 못하는 사람인 내가 안쓰러웠고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렇지만 오늘처럼 내 의지가 아닌 외부로부터의 스트레스가 무턱대고 나를 찾아오면 다시금 나를 안쓰럽게 여겼던 기억을 꺼내야 한다. 내일은 잘될 거라고 날 다독이면서 말이다. 뭐 생각해보면 이건 지금의 나를 이루게 한 단단한 피부다. 상처가 난 곳에 딱지를 앉히고 더 큰 상처가 되지 않도록 나를 보호한다. 좋아질 거야. 좋은 일이 생길 거야 같은 말을 되뇌면서 스스로한테 잘해보자고 응원하고 힘을 주려 한다. 날 응원하는 사람이 누굴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나를 응원해야 하니까.


대신 요즘에는 억지로라도 좋은 일에는 과감히 좋아해 보려고 노력한다. 순수하게 어린아이처럼. 불안한 눈빛을 숨길 필요 없이 그냥 좋은 일을 있는 그대로 좋게 받아들이려고 연습한다. 그 요즘이라는 게 30대 초반부터니 5-6년을 그런 생각을 가지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도 아직 불쑥하고 반대편이 튀어나온다. 좋은 일을 과감하게 좋아하려면 꽤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무너지지 않을 용기도 필요하고, 조금 삐끗했을 때 날 지지해줄 수 있는 단단함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아직도 좋은 일을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연습 중이지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이 그냥 순수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좋겠다. 그런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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