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이란 말은 그 자체로 어딘가 매력적이다. 죽음만이라도 평등할 수 있다면, 그래서 고통의 토양 자체를 없앨 수 있다면. 어쩌다 운이 좋으면 리셋이 될지도 모른다는 착각. 버티기 힘든 불안한 삶에 멸종은 마지막으로 꿈꿀 수 있는 행복한 파멸이다. 가장 완벽한 디스토피아적 유토피아.
멸종이란 단어 자체에 매혹을 느낀다면 <EBS 다큐 10+ 지구 대멸종> 시리즈를 보자. 그중에도 제3편 [백악기의 소행성 충돌]을 꼭 챙겨보길. <지구 대멸종> 시리즈는 지구 역사에 존재했던 5번의 대멸종을 다루는데 그 양상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CG 기술 발달로 멸종의 순간은 초단위로 생생하게 재현된다. 그중에서도 공룡이 사라졌던 백악기 대멸종에 대한 묘사는 멸종 판타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반경 10km가 넘는 거대한 운석이 총알보다 20배 빠른 속도로 날아와 지구와 충돌한다. 숫자를 동원한 각종 비유가 파멸의 크기를 가늠하게 해 준다. 멕시코만을 강타한 충돌로 48km 깊이의 구덩이가 발생하고 수소폭탄 1억 개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발생한다. 반경 160km 안에 있는 물이 모두 증기로 변한다. 바위는 부서지는 과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기화된다. 음속보다 빠른 충격파가 북미 대륙으로 퍼져나간다. 인류 역사상 경험한 적 없는 진도 13의 강진이 발생한다. 시속 960km에 달하는 쓰나미가 동심원 형태로 지구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음속과 맞먹는 속도다. 파도 높이는 300미터에 이른다. 내레이션이 정점을 찍는다.
“고통 없이 일찍 죽는 것이 오히려 운이 좋을 상황이다.”
충돌 지점 반경 400km 안의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인지하기 전에 사라졌다. 죽음의 순간을 계획할 수 있다면 가장 매혹적인 선택이 아닐는지.
차라리 전쟁이나 나버려라. 그냥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자조가 넘쳐난다. 넘쳐나는 말은 관용어가 되면 그다음부터 의미가 변형된다. 망했다는 말이 일상이 되면 정말 망했음을 표현할 말이 빈약해진다. 망했다는 말로는 망했음을 표현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더 처절하게 망했음을 표현할 말들이 필요하다. 멸종이나 멸망은 이런 맥락에서 망했다는 말보다 더 망했음을 표현한다. 그런데 멸종에 대한 환상을 산산조각 내는 소설, 망했는데도 계속 살아보라는 소설이 있다. 황정은 <계속해 보겠습니다>.
살려는 의욕이 제로에 가까운 엄마 애자가 있다. 이름 그대로 사랑을 위해 태어났던 종족, 그리고 사랑이 사라졌을 때 삶도 사라진 종족. 애자는 남편 김금주가 공장 톱니바퀴에 말려들어 죽고 난 후 멸망 상태에 돌입했다.
애초 반대하던 결혼이었고 이쪽엔 제사 지낼 아들내미 하나 없으므로, 라는 명목으로 사고 합의금을 친가 쪽에서 받아갔고, 애자도 생활에 별 열의가 없어서 애자와 나나와 내겐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와 살던 집의 계약이 끝나 집을 비워줘야 할 때가 되었는데 애자는 짐도 꾸리지 않고 나날을 생각에 잠겨 보내고 있었다.
죽고 나면 그뿐, 이라면서 세계엔 원한이 가득하다고 애자는 말한다.
아빠는 죽었고 엄마는 죽은 듯 산다. 따라서 자매 소라와 나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둘 사이 끼어든 또 다른 존재. 옆 집 사는 나기와 나기 엄마 순자. 요양원에 맡겨진 애자를 빼고 나면 이들 넷은 두 집이지만 한 식구처럼 유사가족을 형성하고 산다. 두 집은 지하에 나란히 붙어 있고 화장실을 공유한다. 소라와 나나는 순자의 도시락을 먹으며 성장하고 나기는 그 둘에게 연인인지 가족인지 혹은 그 사이 무엇인지 규정하기 어려운 관계 속에 위치한다.
주로 소라와 나나 이야기가 중심인 소설 속에서 삶은 예상대로 고통의 연속이다. 산재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인재. 삶도, 사람도 다 괴로울 뿐인 세상이다. 그리하여 무언가를 싫어할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 삶은 무욕하며 단지 살아낼 뿐인 시간의 집합체다.
나는 사람과 접촉하는 게 싫었다. 닿는 것은 싫다. 닿아도 괜찮은 것은 나나와 나기뿐, 나나와 나기뿐이고, 나나와 나기는 그것을 잘 알지. 그것을 잘 아는 나기에게 섹스를 한 지도 일년이.....라고 말해봤자.
나는 나나. 나나는 나. 좋아하는 것보다도 싫어하는 것보다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잔뜩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결국은 비등한 에너지의 소요. 이것저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좋아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기의 삶도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다. 고등학교에서 나기는 소위 왕따였고 동성애자였는데 사랑했던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무리의 중심에 있었다. 나기는 끊임없이 배신당하는 관계 속에서도 사랑을 놓지 못하고 자기혐오를 키우며 성장했다.
자신들에게 맞고 있는 몸이기 때문에 혐오했을 것이고 때릴수록 맞고 있는 그 몸에 관한 혐오는 불어나 더욱 때렸을 것이다. 맞아도 맞아도 상황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여겨졌다.
너는 개입하지 않았다. 보태지도 않고 말리지도 않았다. 너는 삼분의 일쯤 타다 남은 소파에 앉아 잡지를 읽었다. 나는 너를 보았다. 맞아가면서도 언제나 보는 것처럼 너를 보았다. 이런 순간에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 너를 열망하고 원망했다.
특별히 살아갈 이유도, 살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었던 소라와 나나와 나기는 한 공간에서 만나 서로를 지탱시켜주는 힘이 된다. 꼬맹이 때부터 서로 아빠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할 만큼 셋은 너무 일찍 성장했다. 이들에게 순자의 존재는 각별하다. 순자는 소라와 나나를 만난 순간부터 세 개의 도시락을 쌌다. 도시락은 상징적이다. 근본적으로 인생은 혼자라는 진리를 체득했지만 적어도 부족 연맹체 같은 유대감 속에서 안도했고 덕분에 삶은 지속되었다.
나나와 나는 소중하게 그것을 먹었다. 성장기였으므로 그 밥을 먹고 뼈가 자랐을 것이다. 뼈에도 나이테라는 것이 있다면 나기네 밥을 먹고 자란 시절의 테가 분명 있을 것이다.
봐 이 공간에 셋뿐인데 이렇게 다르잖아. 간장을 좋아하냐 좋아하지 않냐, 하다못해 그런 질문에도 답이 다르잖아. 다 달라. 사소하게도 다르고 결정적일 때도 다르지. 말하자면 나는 간장에 무덤덤한 부족, 소라는 간장을 좋아하는 부족, 나나는 간장을 싫어하는 부족.
갈등은 동생 나나가 임신을 하면서 시작된다. 소라는 애가 싫다. 애를 만드는 게 싫다. 나나가 애자와 같은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싫다. 가족을 늘리는 게 싫다. 관계가 늘어나는 게 싫다. 세대가 이어지고 그 세대로 감정이 전달된다는 게 싫다.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엄마가 된다는 것이고 엄마가 된다는 것은 애자가 되는 것. 회로가 그렇게 꼬여 있다. 생각이 아니고 심정의 영역에서. 그러므로 애초에 아기는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아기를 낳지 않는다면 엄마는 없지. 엄마가 없다면 애자도 없어. 더는 없어. 애자는 없는 게 좋다. 애자는 가엾지. 사랑스러울 정도로 가엾지만, 그래도 없는 게 좋아. 없는 세상이 좋아. 나는 어디까지나 소라. 소라로 일생을 끝낼 작정이다. 멸종이야. 소라, 라는 이름의 부족으로.
무감한 사람은 괴물이 된다
멸종이야 소라.
소라는 진짜 멸종을 꿈꾸지는 못하지만 자기 대에서 관계를 소멸시키려 한다. 그것이 소라에게는 작은 멸종이다. 그런데 나나가 그 기본 전제를 깨려 한다. 나나는 건조한 대로 사랑을 시도하고 애를 낳으려 한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가족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아기가 생기더라도 아기에게든 모세 씨에게든 사랑의 정도는 그 정도,라고 결심해두었습니다. 애자와 같은 형태의 전심전력, 그것을 나나는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우리’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고통스럽다. 모세는 성역할 구분이 분명한 보수적 환경에서 자랐고 나나는, 이를테면 요강을 쓰는 사람은 모세 아버지인데 왜 항상 모세 어머니가 요강을 비워야 하는지에 대해 납득하지 못한다. 그 질문을 던졌을 때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세도 납득할 수 없다. 모세 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주를 위해 날짜에 맞춰 수술하고 애를 낳아야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 요컨대 나나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관계는 폭력적이었다. 남의 감정이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예의 없는 관계는 그 자체로 폭력이다. 나나 자신도 그런 폭력에 둔감할 때가 있었다. 나나에게 무감한 사람은 괴물이 된다고 가르쳐 준 것은 나기다.
그 시절에 나나는 작은 동물을 괴롭히며 놀았습니다. 강아지, 고양이, 햄스터, 드물게 기니피그. 꼬리를 밟아본다거나 발바닥을 찔러본다거나 가슴을 눌러본다거나, 괴롭혀서 즐겁다거나 괴롭다거나 도대체 뭘 느끼는 것도 없으면서 멍하게 괴롭혔습니다.
아파?
오라버니는 물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기억해둬,라고 오라버니는 말했습니다.
이걸 잊어버리면 남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괴물이 되는 거야.
나나는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혼자서 애를 키워보려 한다. 이별을 통보받은 모세는 나나를 찾아온다. 흥분한 나머지 나나를 힘으로 제압하고 어째서 헤어지려는 것이냐, 애는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따진다. 어깨를 제압당하고 목을 졸린 채 나나는 혼미한 정신상태에서 손을 휘둘러 모세의 빰을 할퀸다. 그리고 때마침 소라가 나타난 덕분에 모세의 손아귀에서 풀려난다. 눈물을 흘리며 언니를 외치는 나나.
지구 나이는 45억 살 정도 된다. 대략 6억 년 전에 맨눈으로 볼 수 있는 크기의 생물들이 나타났다. 2억 3천만 년 전에 공룡이 등장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200만 년 전에 등장했으며 현생 인류는 20만 년 전에 나타났다. 급격하게 종이 줄어드는 대멸종은 지금까지 다섯 번 있었다. 가장 심각했던 페름기 대멸종 때는 90%가 넘는 종이 사라졌다. 공룡 멸종으로 유명한 백악기 말 멸종 때는 공룡 100%, 조류 95%, 포유류 90%가 사라졌다. 덩치가 클수록 많이 죽었는데 육지에서 체중이 25kg을 넘는 종은 모두 사라졌다. 지금까지 지구 상에 존재했던 생명체 중 99%는 멸종했으며 평균 생존기간은 500만 년이다. 숫자는 때로 그 어떤 설명보다 간명하고 직관적이며 압도적이다.
멸종은 보편적 현상이다. 모든 종은 언젠가 사라진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하지만 멸종의 국면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보다 아는 게 별로 없다. 마치 달력 페이지를 넘기듯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훅 넘어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달력을 찢어 버리면 뭐가 됐든 새 페이지가 열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멸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 몸이 쇠락 국면을 거쳐 죽어가는 것처럼 수많은 멸종이 말해주는 바, 멸종은 멸종해가는 과정 그 자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짧아도 수천 년, 길게는 수십만 년도 더 걸린다. 우리에게 멸종은 순간 사라짐이라기보다는 지속되는 매드 맥스 와도 같다. 거부할 수 없는 재해가 닥쳐 인간이 멸종 국면에 들어서면 어떻게 될까? 모든 능력과 자원을 동원하여 최후의 일인이 사라질 때까지 멸종은 고통스럽게 오랜동안 지속될 것이다. 멸종 국면에 이르러도 죽음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지구의 역사가 숫자로 말해주는 진실이다.
나는 예전엔 이런 뉴스를 들으면 지구가 망하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별다른 감상이 없었거든. 그런데 요즘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어. 아기가 태어났는데 세상이 그렇게 끝나버리면 너무 억울하잖아. 모처럼 낳았고 모처럼 태어났는데 그냥, 세계가 끝나버린다면.
나는 말했다.
공룡이 사라졌잖아.
어.
멸종했잖아.
멸종했지.
멸종이라서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 같지만 실은 천만년이 걸렸대.
그랬대?
천만년에 걸쳐 서서히 사라진 거야.
꽤 기네.
길지.
......
그렇게 금방 망하지 않아.
세계는, 하고 덧붙이자 나나가 말했다.
그렇게 길게 망해가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단번에 망하는 게 좋아?
아니.
그럼 길게 망해가자.
망해야 돼?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는 얘기야.
다시 멸종을 생각한다. 멸종이라는 진통제로 현실에 닥친 고통을 잊어보려 하지만 그렇게 고통에 둔감해지고 나도 남는 것은 여전히, 그냥 다시 현실이다. 그러니 서로의 고통을 외면하려 하기보다는 같이 아파하는 마음을 놓지 않도록. 그래서 금방 망하지는 않을 테니 뭐라도 꿈꿔볼 수 있는 힘을 계속 지켜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