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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동나동 Oct 08. 2019

출구가 없는 공포 <낙하한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낙하한다, 추락한다.


일반적으로 사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진다, 낙하한다, 추락한다. 이 동사들은 부정적인 상황에서 자주 쓰인다. 떨어지면 아프다. 언어보다 몸이 먼저 안다. 그리고 개념은 언어로 다듬어진다. 떨어진다는 말은 위/아래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위에 있는데 떨어지지 않는 것들도 있다.


실험이나 관찰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 인류는 자연현상이 신 자체 거나 신의 행위라고 생각했다. 설명이 체계적으로 발달하면서 종교가 된다. 여기에 초보적인 인과관계와 관찰이 더해지면서 상상훈련을 하기 시작하고 논리를 덧댄다. 자연철학의 탄생이다.


인류가 처음 생각한 지구와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훈련을 해보자. 나는 처음으로 지구와 우주의 구조를 생각하는 호모 사피엔스다. 세상에 대한 인식은 내가 서 있는 여기를 중심으로 동심원 모양으로 퍼져나간다. 이동수단이 발달하면서 동심원은 점점 커질 것이다. 그러나 이동수단의 발달은 더디다. 지금 동심원의 크기는 크지 않다. 세상의 끝은 내 인식이 닿는 한계보다 조금 더 멀리 있는 정도다. 보통은 내가 가보지 못한 강이나 산 너머. 그곳에는 어떤 절대적인 두려움이 존재한다. 그 존재는 말에서 말로 전해져 올뿐이다.


아직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상상조차 힘들다. 그리고 머리 위로 해와 달이 뜨고 진다. 온갖 별들이 움직인다. 이들의 움직임을 이해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한다. 그런데 왜 높은 곳에 있는 별은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별은 우리 머리 위에 있는데 왜 떨어지지 않는가?


그리스식 세계관은 실험보다는 상상훈련에 기초해 있고 이것을 고상하게 말해 자연철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토대에는 수학이란 고도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 자연철학은 밑도 끝도 없는 주장도 부지기수지만 근대 과학이 이룩한 수많은 업적 중에는 그리스 자연철학에 뿌리를 둔 것도 매우 많다. 그리스 철학은 사고의 원형을 모아 둔 잡다한 만물 백화점이었다.


떨어진다는 단순한 현상 하나만 놓고 봐도 질문이 산더미다. 왜 어떤 것은 떨어지고 어떤 것은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사물을 떨어지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가? 모든 사물은 똑같은 속도로 떨어지는가? 이 숱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생각보다 험난하다. 천재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고 했다. 중력에 대한 학습이 없으면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확실히 돌은 깃털보다 빨리 떨어진다. 그런가 하면 세상은 물, 불, 흙, 공기 4 원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돌이 빨리 떨어지는 이유는 돌이 흙으로 구성되어 있어 본래 자기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 이론은 갈릴레이에 이를 때까지 2천 년간 서양세계를 지배했다.


영화 <아고라>에 보면 그리스의 시대정신이 저물어가는 황혼 녘에 한 시대의 몰락을 함께했던 수학자 히파티아가 등장한다. 영화는 히파티아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제자들과 토론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째서 별은 떨어지지 않는가? 별은 달아나지도 떨어지지도 않으며 이상적인 형태의 경로를 따라 동서로 움직인다. 바로 원이야. 원으로 움직이는 한 별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라고 말한다. 별들의 운동에 수학적인 질서가 숨어 있다고 믿었던 그리스인들은 원이 가장 이상적인 도형이기 때문에 별들이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토론은 이어진다.


“그런데 지구에서는 어떨까? 물체는 떨어지면서 원이 아닌 직선을 그린다. 대체 지구 내부 무슨 조화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노예든 상관없이 전부 아래로 잡아당길까?”

“무거워서겠죠. 아니 중량 때문에?”

“근본 원인을 말해야지 궁금해본 적 없나? 여러분의 발바닥이 만물을 지탱하고 끌어당기는 우주의 중심을 향하고 있는 까닭? 중심이 없다면 우주는 모양도 실체도, 끝도 없는 혼돈일 거야. 그렇게 세상이 아수라장이라면 아니 태어남만 못해.”


현대인들은 물체가 떨어지는 현상이 중력(gravity)에 의한 잡아당김이란 걸 잘 안다. 떨어진다는 건 관찰자인 인간의 관점이고 객관적 사실은 지구가 물체를 지구 중심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것이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중력을 알아냈다는 일화는 사후적으로 지어낸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중력의 발견은 세상을 인식하는 새로운 눈을 달아준 격이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티코 브라헤, 케플러, 헬리, 뉴턴 등등에 이르기까지 이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하는 시기를 과학혁명이라 부른다. 과학혁명은 근대를 여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다.


<낙하한다>


성석제 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에는 별의 회전운동 원리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돌을 세게 던져 초속 7.9km가 되면 돌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지구를 빙빙 돌게 된다. 조금 더 세게 던져서 11.2km가 되면 돌은 지구를 벗어나게 되고 16.7km를 넘으면 태양계를 벗어날 수 있다.


이 설명은 뉴턴의 사고 실험과 일치한다. 뉴턴은 아주 높은 산에서 대포를 쏘는 상상을 했다. 너무 약하게 쏘면 포탄은 중력에 의해 다시 지구로 떨어질 것이다. 너무 강하게 쏘면 포탄은 지구 중력을 벗어나 우주로 날아갈 것이다. 정확히 그 중간 정도의 힘으로 쏘면 포탄은 지구 주위를 빙글빙글 돌게 될 것이다. 결국 떨어지는 것도 떨어지지 않는 것도 모두 중력 때문인 것이다.


황정은 소설 <낙하한다>는 이렇게 시작된다.


떨어지고 있다.

삼 년은 지났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조금도 빨라지지 않았다. 좀 전과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

삼 년 전과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

농담이 아니다.

떨어지고 있다.

상승하고 있다.


구체적인 시공간은 나오지 않는다. 왜 떨어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랄 것도 별로 없다. 단지 떨어지면서 시작했고 여전히 떨어지면서 끝이 난다. 그런데 더 정확히는 떨어지는 게 아니라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무중력 공간 속에서.


영화 <그래비티>는 무중력 상태가 불러오는 공포를 너무나 생생하게 시각적으로 재현했다. 그것은 떨어지는 것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우주적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외롭고, 막막하며, 무엇보다 출구가 없다. 이 소설은 그런 소설이다. 외롭고, 막막하며, 출구가 없다. 소설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적 공포를 재현한다.


출구 없는 무중력 공간에서 떨어지는 것인지 상승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차라리 무언가에 부딪치고 싶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어떻게든 이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며.


외롭고 두려운 것도 관성이 되었다.

관성적으로 외롭고 두렵다.

외롭고 두렵고 무엇보다도 지루하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진다.

어디든 충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삼 년째 떨어지고 있으니 슬슬 어딘가 충돌해도 좋을 것이다. 부서지더라도 충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출구 없는 우주를 부유하는 시대의 소설


소설은 의도와 무관하게 시대적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이 소설은 20년 전에만 나왔어도 아무런 공감대를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20년 전이라면 이런 소설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은 우주적 외로움을 공감할 수 있는 시대에만 나올 수 있다. 우주적 외로움과 공포가 뭔지, 왜 맥락 없이 주인공은 무중력 공간에 떨어져 있는 것인지 공감할 수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소설이다. 나쁜 놈도 없다. 우리는 그저 재난에 처한 심정이 되어, 음 그냥 재난에 처한 심정이 된다. 뭘 어쩌자는 게 아니라. <낙하한다>는 그런 소설이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고통과 외로움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다.


일정한 거처도 안정적인 수입도 뚜렷한 탈출구도 없는 수많은 이들의 고단한 삶이 떠올랐고 무엇보다 세월호가 떠올랐다. 오늘날 재난은 어느 날 사기를 당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그런 종류의 재난이 아니다. 실수 따위와는 무관하게 공기처럼 존재한다. 그리하여 재난 자체가 일상이 되고, 재난이 관성이 되는. 눈보라 맞으며 광고판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어도, 어느 날 아파트 관리인이 비인간적 처우를 하소연하며 스스로 목숨을 던져도 집값 걱정을 하는, 이 세상이 재난이다. 재난은 이제 시스템 그 자체이다. 재난은 무중력 상태 우주처럼 도처에 압도적으로 펼쳐져 있다. 


내가 속한 좌표를 알 수 없고, 그리하여 앞으로 가는 것인지 뒤로 가는 것인지 심지어 떨어지는 것인지 상승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우주적 공포. 출구가 있다면, 방향이 있다면 누군가는 주장을 할 것이다. 저리로 가자고. 하지만 누구도 자신 있게 출구를 말하지 않는다. <낙하한다>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시대의 소설이다.


낙하하는(상승하는) 내내 주인공 ‘나’는 공상을 한다. 그러나 그 공상도 완결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에피소드 몇 개에 불과하다. 그 에피소드 속에 방이 등장한다. 그 방에는 개수대가 있는데 개수 구멍이 없다. 문도 없다. 시계도 없다. 한마디로 진공 상태다. 구체적인 시공간이 없다. 내부와 외부가 없다. 공상조차 시작도 끝도 없는 지옥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끊임없이 되뇌는 문장이 하나 있다.


세 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은 하나 존재하고 유일하다.


이 문장은 고등학교 2학년이 공간도형을 배울 때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간단한 수학 명제다. 공간에 세 점을 찍어보라. 그 세 점을 지나는 평면은 유일하게 하나 존재한다. 세 점이 한 직선에 있을 때는 예외다. 카메라 삼각대나 향을 피우는 향로가 다리가 세 개인 이유다. 어떤 지형에서도 다리가 뜨지 않는다. 반면 다리가 네 개면 이야기가 다르다. 바닥이 고르지 않은 상태에서 세 다리를 고정하면 하나가 뜬다. 네 점을 지나는 평면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걸상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수학 공식처럼 분명할수록 거짓말처럼 들리는 시대다. 위아래조차 분간할 수 없는 곳인데 하물며. 주인공은 이 문장이 애매하다고 말한다. ‘하나’라는 단어가 두 번 들어간 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계속 되뇐다. 계속 되뇌다 보면 외로운 것도 애매해질지 모른다고.


주인공 ‘나’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지하철역이다. 지하철역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출구를 물어보고 대답해주는 장면, 그게 전부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건넨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동시에 주인공이 기억하는 마지막 말이기도 하다.


친절하게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친절, 대답, 고마움. 우주적 공포 속에서 기억해낸 세 단어. 진공상태에서는 음파도 반사되지 않는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대답이란 우리에게 방향감각을 일깨워주는 말. 현실에서 출구는 이렇게 간단한 것이지만,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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