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도우 Jan 07. 2024

이상한 사랑 8

아빠와의 마지막 50일

아빠가 암 판정을 받은 직후, 기운이 떨어져 보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70여년을 쉴새 없이 앞만 보고 달렸고 이제서야 장성한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쉬려 하니 돌아온 건 '암'이었다. 그것마저도 어떤 병인지 모른 채 본인이 버티려 했건만 이제 그 병이 '암'이라는 사실을 안 이상, 마지막 하나 남은 끈을 놓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가족들은 오히려 포기하지 않았다. 그동안 아빠가 우리를 위해 혼자 헤쳐온 시간들을 생각하면 아빠는 이제 호강을 해야 한다. 이렇게 허무하게 갈 수는 없었고 아빠가 끈을 못 잡으면 우리가 어떻게든 끈을 이어 다시 아빠 손에 쥐어줄 생각이었다.



다시 집에 돌아온 아빠는 확실히 병원에 있을 때보다 평온한 표정이었다. 아빠는 아무리 술에 취해도 외박은 없었고 무조건 집에 들어와 따뜻한 밥 한 끼로 '해장'을 하는 사람이었다. '집돌이' 아빠가 며칠간 병원 응급실 신세를 지고, 암 판정까지 받고 돌아왔으니 더더욱 집이 그리웠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돌아온 아빠를 위해, 그리고 앞으로 더 강해질 아빠를 위해 백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동생 부부는 아빠가 다시 걸을 수 있도록 보조기구를 중고가로 구매해 선물했다. 올 겨울 들어, 아빠가 하체 힘이 떨어지면서 집에서 의자를 끌고 다니며 걸어다녔는데 이제 제대로 된 기구에 의지해 걸음연습을 할 수 있게 됐다. 


집에 돌아온 이후 침대에 누워있었던 아빠는 우리들의 응원에 힘입어 보조기구에 의지해 처음으로 걸어다녔다. 우리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고, 내내 표정이 어두웠던 엄마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이대로만 아빠가 버텨주고 지치지만 않는다면 해볼만한 싸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부터 다시 아빠는 주저앉았다. 도저히 하체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면서 걷는 연습을 포기했다. 특히, 용변이 문제였다. 화장실까지는 어떻게든 가는데 변기에서 다시 일어날 힘이 없다는 것이다. 이 모습을 하루 종일 지켜보는 엄마의 속은 타들어만 갔다. 지금이야 엄마가 어떻게든 도와주지만 언제까지나 도와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엄마 나이도 70 가까이 되니 체력적으로 힘에 부친 모습이었다.


집 화장실에 아빠를 위한 보조 바까지 설치했건만, 무용지물이었다. 엄마는 "아빠가 의지가 없어. 조금만 하체에 힘을 주면 일어설 것 같은데 안 해"라며 고개를 저었고, 아빠는 "정말 힘이 안 들어간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엄마는 삼시세끼를 아빠 침대에 가져다주었고, 아빠는 점점 활동반경이 줄어들었다. 삼성서울병원에 가기 전까지 더 건강한 모습으로 가야하는데 어째 아빠의 몸은 쇠약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집에 가서 아빠를 채근하며 "걷는 연습을 해야한다"고 했지만 아빠는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그 사이, 나와 엄마는 아빠의 사업정리도 진행하고 있었다. 서서히 정리하기로 한 부탄가스재충전 대리점을 갑자기 이렇게 정리해야 하니 안타깝기만 했다. 아빠는 30대 중반부터 '가스' 사업을 시작해 지금까지 현장에서 뛰었다. 지금은 사양산업이지만 LPG 가스 소매판매로 우리 가족을 먹여살렸고, 이후에는 지금의 부탄가스 재충전 대리점을 창업해 정말 부지런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셨다.


사업 정리를 위해 아빠가 매일 끌었던 1톤 트럭도 폐차를 시켜야 했는데 곳곳을 살펴보니 녹이 많이 슬어있었고, 운전석을 제외한 조수석은 온갖 서류들과 쓰레기들이 넘쳐났다. 가족을 위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고, 달려야 했던 아빠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다. 결국 아빠의 몸이 성치 않았던 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빠가 아프고 나서 아빠의 1톤 트럭은 계속 같은 자리에 주차되어 있었다. 아빠가 집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이 겹쳐보였다. 이 주차구역은 아빠의 '최애' 주차구역이었다. 우리 집 호수라인 출입구 바로 앞에 있는 곳이었고, 내가 새 차를 뽑았을 땐 아빠가 출근한 나를 대신해 이 곳에 차를 주차해주기도 했다. 이제 이 구역에 있던 아빠의 1톤 트럭은 자리를 비워줘야했다. 


아빠의 1톤 트럭은 폐차장으로 떠났고, 그 자리에 다른 차가 주차됐다. 

내 마음은 허망해졌고, 아빠에게 이 사실을 알려줬다. 아빠는 아무 말을 안 했지만, 허공을 응시하는 눈에서 40여년의 시간이 느껴졌다.


(이상한 사랑 9에서 계속)

작가의 이전글 이상한 사랑 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