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이 휘몰아친다
벚꽃이 펴서 아주 잠깐 들떴었다.
벚꽃이 피고 따뜻해졌다는 건, 이제 정말 이사해야 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뜻이다. 지금 이곳에서 살면서 소소하게 기쁜 일들도 많이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굵직굵직한 회색빛깔의 기억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마음 한편으로는 이 동네를 완전히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엄두가 나질 않아서 되도록 지금 사는 동네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생각했었다. 같은 동네의 집을 몇 개 보다 보니 4년 사이 (소형아파트) 전셋값이 많이 올랐다는 것이 느껴졌다. 전세금 삼천만 원을 더 올려도 지금 사는 집보다 깨끗한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서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여러모로 조건에 맞는 매물을 발견했다. 그러고는 '한번 보기나 하자.'라는 마음으로 갔던 그 동네에 한눈에 반해버렸다. 서울보다 가격도 저렴한 데다가 평수도 넓고 깨끗했고, 동네 분위기도 훨씬 활기찼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이사가 시작되었다. 무슨 일이든 미리미리 해치워버려야 속이 시원한 나는, 두 달 전부터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실제로 보러 다닌 건 두 달 전이지만 인터넷으로 서칭 하기 시작한 건 6개월 전부터다.) 이사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시간을 여유롭게 잡고 준비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사하기 삼 개월 전에 '대출, 이삿짐센터, 청소' 등 준비해야 하는 모든 것을 미리 세팅해 두고 싶은데, 부동산에 빨리 가면 매물이 없을뿐더러 물건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대출도 마찬가지다. 청년버팀목전세자금 대출로 갈아타려고 하는데 이 대출은 심사를 잔금일로부터 한 달 전에 시작한다. 하나라도 계획에서 벗어나면 짧은 시간 안에 정신줄 잡고 다시 일을 진행할 자신이 없다. 어디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이사하고 대출이 실행되기 전까지 쭉~ 조마조마한 상태로 지내야 하는 것이다.
이 와중에 요즘 회사 업무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복잡한 일만 들어오고 있고, 거기에 더해 이직하고 싶었던 회사의 공채가 시작되었다. 머릿속이 온통 해결해야 할 일들로 꽉 차기 시작했다. 퇴근하면 필라테스도 가야 하고, 이력서도 작성해야 하고 포트폴리오 수정하고.. 이삿짐센터에서는 견적 내러 방문한다고 하고.. 그리고 머릿속에서 도저히 지울 수 없는 대출이 될지 안될지에 대한 걱정! 사실 대출이 안 나올 이유도 딱히 없지만, 사서 걱정하는 성격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이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다행인 건 날씨가 따뜻할 때 이사 한다는 것이다. 지긋지긋했던 서울을 떠나서 새로운 집, 새로운 환경으로 이사한다는 설렘과 동시에 지금 살던 동네에서 떠난다는 사실이 시원섭섭하다. 나를 기어코 서울에서 버티게 만든 이 집과 애증의 동네, 그리고 힘들 때 나를 많이 위로해 주었던 한강.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을 느끼게 했던 사건들을 뒤로하고 또 다른 새로운 일들이 시작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