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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이 Jul 22. 2024

우주의 재구성

통제 :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우리가 사는 공간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우주'일 것입니다. 말이 우주지 사실 우리가 느끼는 그것은 허공에 떠다니는 공기 입자처럼 직접 와닿지 않는 두리뭉실한 어떤 개념일 뿐이죠. 오늘날에도 우주에 관하여 일부 과학자들은 재미있는 주장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우주와 유사한 다른 공간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예를 들면 이런 것이죠. 길을 걷다가 나와 외모가 똑같은 사람을 마주치는 겁니다. 처음에는 서로를 보며 당황을 하겠지만 곧 호기심에 인사를 건넬 수도 있겠네요. 악수를 하며 자기소개를 한다면 서로 다른 목소리와 말투를 듣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른 반응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상상만으로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네요.  



    한편, 이런 생각이 스치듯 지나갑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느낌을 받는다면 그 또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입니다. 즉, 같은 상황을 마주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두 사람은 이미 서로 다른 우주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일 예로, 욕쟁이 할머니 식당을 구수한 욕을 듣기 위해 즐겨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욕이 기분 나빠서 가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옆 차선에서 차선변경을 하는 차량을 차분히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클랙슨(klaxon)을 요란하게 울려대며 위협하는 사람도 있죠. 같은 상황에서도 서로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사람에 따라 우주 공간이 재구성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5천만 개의 우주가 중첩된 지역으로 볼 수 있겠네요.




    '불안을 이기는 철학'이라는 책에서 '통제 테스트'에 관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스토아 철학에 근거하여 우리 각자의 우주를 효과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하는데요. 통제 여부를 판단하여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방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토아 철학을 적용하여 어떻게 우리의 우주를 재구성 할 수 있을지에 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런 상황이 있을 수 있겠죠. 상대방이 나에게 무례한 행동을 계속하는 상황이라고 해보죠. 처음에는 참거나 그러지 말라고 만류할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대방을 꾸짖거나 가르치려 노력하면서 정신적, 감정적 에너지를 소비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죠. 싸움이 벌어지는 순간 이미 서로에게는 득보다는 실이 많아집니다. 싸움은 어떠한 형태로든 득이 존재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제 테스트'를 적용해 보는 겁니다. 


    쉽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무례한 행동을 하는 상대에게 '무례한 행동을 그만 멈추세요.'라고 말을 했는데 상대가 '네. 그만하겠습니다.'라고 했다면 상대방을 통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곧 그 상황은 마무리가 되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겠죠. 아주 이상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상적인 상황이 벌어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즉, 상대방이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 많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제할 수 있을까요? 상대방의 무례함을 받아들이는 우리 자신을 통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례하게 구는 상대방을 착하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것이니까요. 마치 맑은 하늘에 대고 비를 내리게 하려 노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죠. 그러는 대신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로 상대방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나에게 무례한 행동을 했을 때, 상대방을 질타하고 공격할 것인지, 상대의 행동을 그냥 무심히 넘겨버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방을 예의 바른 사람으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차라리 후자의 노력을 하도록 결정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각자의 우주를 평화롭게 유지하는데 더 유리할 테니까요. 이것은 어느 누구든지 어떤 상황에 마주하더라도 적용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문득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녀석이 생각납니다. 아버지로서, 아들이 더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노력하면 그 기대가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등등의 말들을 마치 주문을 외우듯 아들 녀석에게 주입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아들을 보며 답답한 마음에 더욱 다그치기만 했습니다. 


    '나는 아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스토아 사상의 가르침을 상기해 보았습니다. 나에게 나만의 우주가 있듯이 아들에게도 자신만의 우주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자 지금껏 했던 노력들은 단지 잔소리에 불과했던 것임을 알 수 있었죠. 아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의 통제권은 아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제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들을 대하는 나의 행동뿐입니다. 쉽게 포기해 버린다고, 잘하지 못한다고 다그치기보다는 곁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습니다. 힘들다고 주저앉을 때 다가가 말없이 안아주는 것이 훌륭한 아이로 자라게 하는 방법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깨달음을 망각하지 않기로 다짐합니다. 




    어릴 적 학업성적이 좋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에게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너는 너만의 장점을 갖고 있어. 어딘가에 너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넌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우주를 효과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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