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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이 Aug 19. 2024

이기적 이타주의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생각

    모처럼 와이프와 장을 보기 위해 마트에 갑니다.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바구니에 담으며 무심코 나 자신이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유는 바로 유통기한에 있었습니다. 같은 제품이라도 유통기한이 긴 것이 있고, 짧은 것이 있죠. 그러나 짧은 것은 그대로 둔 채 아직 기한이 많이 남아있는 것을 고르게 됩니다. 오늘 당장 먹을 음식이라 기한이 많이 남아있을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죠. 어쩔 수 없이 며칠 두었다가 먹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남겨두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요. 뒤늦게 이런 생각이 들다가도 또 막상 장을 보러 가면 가장 기한이 많이 남아있는 제품을 샅샅이 뒤져 담을게 불을 보듯 뻔합니다. 저도 참 이기적인 사람인가 봅니다.

    



    버스 정류장에 서있다가 한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굽은 허리에 야윈 체형을 가진 할머니는 얼마나 부지런하신지 주워 담은 폐지로 리어카를 한가득 채우셨습니다. 아마도 새벽부터 폐지 줍기를 다니셨을 겁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그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다가가 리어카를 밀어드렸습니다. 버스가 곧 도착하기에 멀리까지 밀어드리지는 못 했습니다.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옷은 온통 땀에 젖어 찝찝했지만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들어서 인지 누군가를 도왔다는 사실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꼭 나쁘지만은 않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처럼 극단적인 말도 없는 것 같습니다. 남극과 북극, 오른쪽과 왼쪽, 흑과 백, 좋은 것과 나쁜 것, 등등. 이 같은 극단적 단어의 묶음은 마치 세상이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을 이분법적인 잣대를 대고 보는 것에 망설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오랜 기간 이와 같은 생각법에 노출되어 왔기 때문이겠지요. '아'와 '어' 사이에 '이'가 있다는 사실을 놓치기 쉬운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생각에서 벗어나면 비로소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적당한' 물건이 눈에 띄거나, '미지근한' 물의 온도가 좋게 느껴지듯이 말이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나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행복하기만 한 사람도 불행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자기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라는 글자에 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어' 또는 '아'가 될 수 있듯이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도 불행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누군가는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행동을 하지만 누군가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우선적으로 합니다. 전자는 우리가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반면 후자는 이타적인 사람이라고들 말하죠. 이분법적 생각에서 벗어나면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의 경계 또한 모호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타적인 행동을 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돕거나 혜택을 주는 행동을 통해 스스로 만족감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타적인 행동이 자신에게 만족감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지속되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의 행동으로부터 오는 만족감은 그 자체로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 본질은 이기심으로 가득 찬 행동임에도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타적 성격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이타주의를 추구하는 사람 또한 본질적으로는 이기주의자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얻는 만족감을 빼앗는다면 더 이상 이타적인 행동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기주의자인지 이타주의자인지를 가르는 핵심은 자기 자신의 이익에서 만족감을 얻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이익에서 만족감을 얻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둘 중 어느 것이라도 자신의 만족감을 얻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다시 앞선 사례로 돌아가 폐지를 줍는 할머니의 리어카를 밀어드렸던 저는 결국 저 자신을 위한 행동을 했던 것뿐이었습니다. 도와드리지 않고 못 본 체 그냥 서있었다면 하루종일 불편한 마음에 시달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를 도와드림으로 인해 하루종일 만족감을 느끼고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할머니께 이익을 드린 것을 통해 제 자신의 이익을 얻게 된 꼴이 되어버린 것이죠. 이와 같은 사례는 무수히 많을 텐데요. 전 세계적으로 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이타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훌륭한 위인들이 이루어낸 업적들은 모두 이기적인 만족감에 집착한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기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은 과연 다를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상황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강할수록 그 욕구의 방향은 이타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서로 얽혀 그 둘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상적인 상황을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뭔가 어수선 하지만 재미있는 생각이 만들어진 기분입니다. 이기주의자가 만족감을 얻으려는 방향이 다른 사람을 향해 있을 때 벌어질 아름다운 상황이 그려지니 말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더욱 이타적인 사회로 성장해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기적이다' 또는 '이타적이다'를 굳이 정의 내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모 아니면 도와 같이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내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것에서부터 만족감을 얻는지, 또 어떤 것으로 인하여 불편해지는지를 알고 그것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누군가를 위해 헌신한다고 해서 훌륭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어떤 피해를 보든 상관없이 나만 편하고 잘되면 된다는 식으로 사는 것도 결코 만족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조화로울 때 가장 안정적이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조화를 이루는 관점을 '이기적 이타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기적 이타주의'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물들이고 계속해서 번져 나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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