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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은 Oct 17. 2023

19. 무해한 만남

"어머, 저 아기 봐! 발 한 번 만지면 소원이 없겠네" 

아기띠에 연이를 안은 남편과 산책하는 중이었다. 빠글빠글 머리에 자그마한 체구의 아주머니 셋이 지나가며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 발이 대롱대롱 흔들려서 눈에 띈 모양이었다. 마치 소녀팬을 연상시키는 하이톤의 목소리에 멈칫, 설마 우리를 보고 하는 말인가 싶었는데 맞았다. 길거리에 그녀들과 우리뿐이었으니. "한 번 만져보실래요?" 내가 말을 건넸다. 말똥말똥 나를 보는 아이에게 '연아, 네 발을 만지면 소원이 없겠대. 모르는 분들이지만 잠깐 이해해 드려'라고 소곤소곤 말했다. 아주머니 세 분은 "어머어머"하면서 다가왔다. 너무 가까워도 실례라면서 1 미터 거리를 띠고는, 아이 발에 손을 대고 꺅꺅 소리 질렀다. 소원이 없겠다고 말한 분은 감기기운이 있어 만지면 안 된다고 아쉬워했다. 그녀는 친구분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부드럽고 탱탱하다, 참말로!" 어리둥절한 연이 빼고 우리 모두 빵 터졌다.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큭큭 웃음이 났다. 귀여운 분들이었다.


갓 태어난 녀석을 데리고 다니면 이런 만남이 잦다. 평소에 눈도 안 맞추고 지나갈 사람들과 마주 보고 웃게 된다. 유아차에 연이를 태우고 길을 걸으면 너도나도 "쟤 좀 봐!" 말한다. 특히 연이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뚫어져라 보는 탓일 것이다. 녀석은 뭐가 그리 궁금한지 고개를 돌려서 쳐다보다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녀석과 눈이 마주친 사람들의 표정은 금세 허물어진다. 뭐랄까. 귀하디 귀한 무언가를 만난 것처럼. "어머나, 안녕"하고 손을 흔드는 사람들에게 녀석은 응답한다. 사람들의 안녕을 따라 하면서 주먹은 쥔 채로 팔꿈치를 흔든다. 다들 어머, 어머 한 마디를 하고 지나간다. 중년 남성이든 할아버지든, 할머니든 내 나이 또래의 여성이든. 나이와 성별을 뛰어넘어 비슷한 반응이다. 동네 사람들을 친근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존재. 


모든 만남이 유쾌한 건 아니다. 간혹 나를 나무라는 할머니들을 만나기도 한다. 선선한 봄바람이 부는 대낮, 놀이터에 앉아 숨을 깊게 들이쉬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지나가면서 호통을 쳤다. "엄마 지는 신발 신고 아는 맨발이네! 찬기 들어간다 어짜노!" 내 발이 잔뜩 움츠러들면서 깜짝 놀랐다. 할머니 호통에 큰 잘못을 한 것 같아 아이 발을 잡는데 뜨끈뜨끈하다. 6월에도 할머니들의 "춥다, 춥다"는 계속되었다. 7월 중순 넘어가면서는 덥다고들 난리였다. "이리 더운데 애를 데리고 나왔네. 아이고, 아이고." 나 들으라는 듯 혀를 차면서 지나갔다.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덥다고. 그냥 애랑 둘이서 집안에 꼼짝 말고 있으라는 건가 싶다. 엄마가 그러면 안 된다, 애가 아프면 엄마 탓이야. 엄마를 비난하는 말은 아이를 위하는 말로 둔갑한다. 


남편과 같이 산책하는 중에 아이 춥다고 걱정하는 할머니를 만났다. 우리가 사는 오래된 아파트의 특성상 나무가 많고 바람 부는 자리마다 벤치가 놓여있어, 할머니들이 앉아있었다. 늘 비슷한 시간에 같은 장소에 앉아 할머니들끼리 두런두런 수다를 떠는 모양이었다. 아이에게 찬 바람 들어갈라 걱정하는 말소리와 왜 돌아다니냐고 나무라는 듯한 소리에 남편은 잠자코 듣더니 말했다. 혼잣말 치고는 아주 크게 "아, 더워 더워. 지금 30도네. 너무 덥다" 하면서 빨리 걸었다. 나도 따라 걸음이 빨라졌다. 걸으면서 핏 웃음이 났다. 그를 보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기술의 중요함을 깨달았다.  

 

오후 세시 즈음, 아이와 산책하는 시간이 좋다. 그 시간이 되면 녀석도 나도 거실 냄새에 질릴 대로 질려버려서 어디론가 나가야 한다. 공기가 텁텁하고 머리가 지끈댄다. 간단히 채비를 해서 유아차에 태우면, 연이는 나가길 기다린 사람처럼 발을 흔들고 고개를 두리번 거린다. 강아지 구경, 나비 구경, 사람들 구경, 흔들리는 나뭇잎 구경 - 밖은 신기한 것들 투성이인가보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돌고래 모양의 놀이기구에 앉아서 시간을 보낸다. 녀석은 재밌다고 까르르, 꺄 여러 소리를 낸다. 특히 그네를 타면서 바람이 불어오면 녀석이 "아아 시원해" 말하는 것만 같다. "갸갸갸 햐햐" 같은 소리를 낸다. 녀석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반복되는 일상에 물려서 더부룩한 기분마저 개운해진다. 거기에 연이를 예뻐하는 어른들을 만나면 상큼함이 더해진다. 


아이를 보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아이를 보는 표정들. 한없이 허물어지면서 맑게 빛나는 얼굴이 반갑다. 아이 덕분에 우리는 서로 무해해진다. 나에게 호통치는 할머니들을 그런가 보다 넘기는 여유를 배우는 건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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