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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은 Sep 14. 2023

17.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오늘은 90년대 가요를 들어볼까" 

남편이 아이를 재우는 날은 '가족오락관'이 열렸다. 그는 거실을 최대한 어둡게 스탠드 조명을 켜고 소파에 앉았다. 분유를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녀석은 흡족한 얼굴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남편은 신중하게 핸드폰을 만지작댔다. 누가 보면 뉴스기사 읽는 것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그러나 곧이어 블루투스 연결음이 들리면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 밤이 지나면(임재범)>. 그는 아이를 안은채 어깨를 흔들었다. 그의 흔들림에 맞춰 이연이 몸도 살랑살랑 움직였다. 


사뭇 비장하고 진지하게 노래 부르는 그와 이게 뭔가 싶은 표정으로 안겨있는 이연이가 묘하게 어울렸다. 나는 웃음이 터졌다. 그는 나보고 다음곡을 고르라면서 핸드폰을 넘겼다. 아이는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고 나는 요리조리 피했다. "그럼 난 이거" <이 밤의 끝을 잡고(솔리드)>. 누구 하나 망설이지 않고 거실이 떠나가라 목청껏 노래했다. 흥이 올라 다음 곡은 <Friday night(god)>. 멜로디가 흘러나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명이 불그스름하고 어두워서 딱 놀기 좋았다. 우리는 코인노래방에서 뽐내던 실력을 발휘하며 무릎을 까딱까딱, 현란하게 스텝을 밟았다. 어느새 아이는 그의 품에서 곯아떨어졌다.  


남편만의 재우기 필살기가 몇 개 있다. 나는 아이가 잠들기까지 같이 누워서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편이다. 녀석은 엎치락뒤치락 실랑이 끝에 겨우 잠이 들었다. 반면에 남편은 낮잠도, 밤잠도 쉽게 재웠다. 그는 애쓰지 않았다. 자장가로 좋은 음악은 비트가 있되 잔잔해야 한다면서 신중하게 고를 때 빼면. 주로 검정치마와 잔나비 노래를 자장가 삼아 아이를 품에 안고 흔들흔들, 살랑살랑 움직이면서 재웠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마인드일까. 흥얼흥얼 음악에 취해 아이를 토닥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잠이 왔다. 


아마도 아이를 만나고 가장 변한 사람은 남편일 것이다. 내가 볼 때 남편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감정기복이 크지 않은 전형적인 ISTJ 유형이다. (그는 MBTI 등의 성격테스트를 좋아하지 않아서, 자신은 이렇다는 둥 말하는 걸 본 적은 없지만 그냥 알 것 같다.) 가령 내가 12월 달력을 보다가 "우와,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화요일이야!" 외치면 그는 말했다. "그냥 하루하루일 뿐이야. 의미 부여하지 마" 그렇다. 우리는 무척 다르다. 


그런 그가 아이 앞에서 한없이 허물어지는 표정을 보고 있으면 새삼 신기해서, 나도 그를 계속 보게 된다.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저리 다정할 줄이야. 아이가 눈빛을 반짝거리며 파트너를 쳐다볼 때, 기분이 좋은지 입을 헤벌쭉 벌리고 그를 볼 때 그는 어김없이 응답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치로, 하이톤에 의성어를 섞어가면서. 아이의 입도 반달이 된 채 헤헤헤와 흐흐흐 사이 어딘가의 소리를 냈다. 그럼 그는 더 신나서 열심히 했다. 아이와 밀당이 중요하다면서 가만히 쳐다보다가 불시에 "으갸갸갸" 같은 소리를.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이 부녀의 케미를 보는 것이 이렇게 큰 기쁨이 될 줄 몰랐다. 


어느 날 저녁, 이연이 그리기 대회가 열렸다. 순전히 내가 아이를 보면서 한마디 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둥근 덩어리는 그리기 쉽지 않을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귀엽거나 예쁘면 그리기 어렵다고. 내가 얼굴과 배 그리고 엉덩이 세 덩어리만 그리면 될 것 같다고 자신만만해하자 결국 대회가 열렸다. 손바닥만 한 도화지에 크레파스를 들었다. 책을 뒤적이며 놀던 아이는 자신을 뚫어져라 보면서 뭔가를 하는 엄마와 아빠가 신기한지 번갈아 쳐다봤다. 


우리는 숨죽여 그리다가 "으악, 연아 미안해"를 연발했다. 나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의 조합(!)이라면 그의 그림은 성깔 있는 아기 조폭을 같았다. 낄낄거리다가 미안하다고 했다가, 서로 그림을 보며 웃었다. 파트너가 말했다. "작은 생명체 볼 일이 많지 않으니 볼 수 있을 때 그려야겠어." 나도 화답했다. "좋아!" 자주 그리기 경연대회가 열리면 좋겠다. 그와 함께, 아이를 만나는 시간은 대체로 행복하다. 어쩌면 아이 덕분에 남편의 새로움을 발견하며 그가 더 좋아지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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