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st comes served
어머니가 첫째를 편애하는 이유
시어머님은 첫째 시아주버님을 참 좋아하신다.
반찬을 하실 때 맏아들 것은
아예 따로 해놓으실 정도다.
아들에 대한 애정지수는 한 마디로 높다.
똑같은 잘못에 야단을 치셔도 옥타브와 단어가 다르다.
이상한 것은 맏아들을 좋아하는데
어려워하신다는거다.
첫째를 좋아하시니 그 손주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00, 우리00” 어머니의 목소리에 가득 담긴
애정이 느껴진다.
똑같은 손주인데 왜 편애를 하실까하며 금새 서운해진다.
며느리라 말 못하고 있는데
눈치 빠른 애들 고모가 가려운 내 속을 긁어준다
. “엄마는 왜 그렇게 큰 아들만 좋아하셔요?”
어머님은 “내가 언제 그랬냐”며 안색을 바꾸신다.
당신의 편애가 들킨것이 무안하셨는지
공연히 큰 아들의 어릴 적 얘기를 꺼내시며 흉을 보신다.
어릴 때 어쨌다고, 저쨌다고 하시지만
결과는 자랑으로 매듭지어지곤했다.
내가 둘째를 낳고, 키워보니 어머님의 편애가
솔직히 반은 이해간다.
첫 아이에 대한 느낌과 둘째는 정말 달라도 다르다. 예쁘기는 둘째 녀석이 더하고,
마음가고 손가는 것은 첫 아이다.
편애만 하면 다행인데 기대치가 차이나니
큰 아이가 안쓰럽게 보일 정도로 문제다.
똑같은 잘못도 큰 아이보다는
작은 아이에게 관대해진다.
큰 아이는 아주 잘해봐야 본전이고
작은 아이는 조금만 잘해도 박수갈채다.
큰 아이가 유치원에서 발표회를 했을 때는
내가 무대에 서는 것처럼
덜덜 떨리고 행여 실수할까 조바심을 냈지만
둘째는 어디 그런가
유치원에 간다고 가방만 매도 귀엽고 대견할 뿐이다.
첫 아이는 “한글을 가르쳐주세요”라고 하기도 전에
교재를 준비하고
둘째는 자기가 알아서 광고 전단지의
업체 전화번호를 뜯어온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내가 다니는 것처럼 긴장된다.
“애가 잘할까? 실수는 하지않을까?”
담임 선생님앞에서는 내가 학생이 된 양
얼굴들기도 어려우니
선배들의 조언에 귀가 솔깃해진다.
한번의 경험은 때 되면 다 하더라,
지나니 별 것 아니더란 당연한 결론을 얻게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둘째를 본다.
그럼에도 첫 아이에게는
여전히 조급함과 긴장으로 대하게된다.
공부할 때니 이렇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장성한 두 아들을 키우신
어느 모친의 경험담을 들어보니
그 마음은 불변인 것 같다.
큰 아이를 군대보내던 날은
집에 돌아와서 이불 뒤짚어쓰고 자식이름 부르면서 대성통곡을 했고
막내는 군대가나했더니 벌써 제대했더란다.
취직할 때도 결혼해서 살 때도 그렇단다.
첫 아이가 잘 풀려야 동생한테도 낯이 서고
아무리 그래도 공부든 경제력이든
형이 동생보다는 나아야 집안의
체면이 선다고 했다.
언젠가 한국에서 장남으로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다룬 책이 있었는데
부모는 부모대로
큰 자식은 자기 나름대로의
기대와 무게가 있다는 것을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혹자들은 부모가 장남을 의지하고
편애하는 이유가 마음이 아닌
노년의 몸을 맡겨야 하므로,
또는 제사를 치를 자식이기때문이라고 하지만
내가 장남을 키우고있는 경험으로썬
그건 아닌 것 같다.
처음 해보는 육아는 실수가 따랐다.
나만의 실수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아이는 상처받고 서투른 엄마때문에
그 서툰만큼 아이는 손해를 본다.
아이가 내 시행착오에 덩달아 헤맸더 것이
늘 마음에 걸려온 탓도 있다.
잘해준 만큼 기대치는 높아지고
잘해봐야 겨우 본전인 아이 앞에는
격려와 박수가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목표가 놓여져있다.
저도 힘들겠지, 딴에는 한다고 하는데
아주 애를 쓰는데….
이러니 나를 포함한 많은 엄마들이
“첫 애, 첫 애”하면서 속을 태우고
마음을 주는 게 아닐까.
그러니 다 큰 어른이 되어도 첫째는
노모에게 안쓰러운 자식일 수밖에.
하지만 조금 더 늙어보니
첫째에 대한 안쓰러움이 집착이 되고
서열을 핑계로 둘째 셋째 막내를
본의아니게 제쳐두었던 것들이
저들끼리의 우애를 막을 수도
있겠다싶다란 생각이 든다.
아. 자식을 키우는 것
사랑하는 것 조차
정답이 없다.
부모라고 다 부모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