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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원썸 Oct 09. 2020

무섭고도 슬픈 이야기

독서를 편식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내 손에 자주 잡히는 저자들이 

하루끼, 베르나르, 그리고 박완서님이다.


한국이 사랑하는 작가 1위가 베르나르 2위가 하루끼라는데 나의 초이스에 놀랍다.

웃음 일 이

개미 일 이 삼 사 오

죽음 일 이


읽다보면 여기서 나온 이야기가 저기서도 나오기 일쑤다.  

위키백과에서 베르나를 열어보면 "우려먹기"란 단어가 그냥 나오는 말이 아닌가보다.

그럼에도 전 세계 "개미" 판매량의 이분의 일, 베르나르 책의 삼분의 일은 한국이라는데 

겹친 이야기라도 좋으니 그이처럼 발칙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게 아닌가싶다.


소설 "죽음"은

" 내가 어떻게 죽었을까"란 시작한다.

화자가 이렇게 말한다는 건 그가 죽음을 인지했다는 거다.

본인이 죽었다는 인식하지못한 채 어린아이들의 아픔을 들어주던 영화 식스센스의 말콤(브루스 윌리스)의

충격, 거부를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의사친구를 만나러 간 소설가 가브리엘은 영매 뤼시의

"당신은 죽었어요" 란 멘트를 바로 인정하고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 내가 이렇게 생겼었구나..."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는 영혼, 슬퍼할 겨를도 없는 것이

독살된 흔적을 발견했기때문이다.

쌍둥이 형제 토미에게 화장해주지말것을  영매 뤼시를 통해 전달하지만 과학자인 토미는 영혼 이런것을 아예

믿지않는다.

결국 뤼시의 약점- 사랑하는 애인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거래로 이용한다.

전 애인을 찾아주겠다란 황당한 약속과 대신 자기를 죽인 범인을 수사하라고 한 것.


가브리엘은 정말 자유로운 영혼이다.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지시를 하다니.  

소설판 사랑과 영혼이다.


떠다니는 수많은 영혼가운데 자신에게 소설의 영감을 수없이 주었던 할아버지영혼도 만난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뤼시의 전애인을 찾으러다니고 뤼시는 가브리엘을 죽일만한 사람들을 조사한다.

그러면서 뤼시가 영계의 오더를 전한다.

"가브리엘, 당신을 부잣집  아이로 환생할 기회를 주겠다고 하네요"


흔치않을법한 환생의 기회보다 범인이 누구인지가 더 궁금한 것이 그의 직업은 소설가다.

복수심때문이 아니라 호기심때문이다.

그가 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산 자에게 명령하고 소통하는 것이

그동안 머리가 알고 있던 "죽음"과는 참 다른 버전이다.


우려먹기는 조금 있다. 

 


내가 어릴 때는 일산화탄소중독, 즉 연탄중독이 더러 있었는데 우리집이 그랬다.

큰 방 하나, 작은 방 하나였던 그 집의  작은 방에서 자고 있던 언니가 정신을 잃은게다.

엄마와 아버지가 매가리 하나 없는 언니의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며

동치미물을 가져오셨다.  

다들 자다 뛰어 나와 정신없이 상황을 지켜보았는데 난 언니가 눈을 감고 있는 것보다

아버지의 큰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버지는 고성을 지르신 적이 없다. 늘 조용한 목소리였는데 얼마나

딸의 이름을 크게, 그것도 여러번 부르시는지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 있는 자식, 행여 다 큰 여식을 잃을까 지금에서나

이해되는 심정이다만 당시

언니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난 뒤에야 아버지가

건강한 우리들을 보셨다.

" 살았다. 살았어.."

새벽이었는데 어떻게 부모님은  작은 방에 자던 언니를 발견했을까 그것도 놀랍다.



아내가 말기암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셨다는 지인이 있다. 

"한 번은 이런 말을 하는거야. 아내가 병원에서 자꾸 저 사람 누구야라고 묻더라구.

뭐, 어디? 아무도 없는데라고 해도

아니 저기 구석에 서 있는 사람말야...라고 하는데 저승사자가 있긴 있나봐."


그 아내가 보았다는 구석에 있는 사람은 전설의 고향에서 들었음직한 저승사자였거나 환각이었을게다.

건강한 사람이 그를 보았다면

"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내가 무엇을 해 드리면 저 사람을 살려주시겠소?" 바지라도 붙잡고 매달려

그냥은 절대 못가게 할 것 같다.


영화 링도 그렇고 콩콩콩 귀신이야기도 그렇고 죽음과 귀신이야기는 우리 머리를 서게 한다.

어릴 때 이런 이야기들으면 이상하게도 화장실을 못갔다.

왜 하필 귀신은 화장실에 나타나는지

공포체험도 그렇고 무서운 이야기다.


그러나 불쑥

내 부모님을 포함해서 병환이나 사고로 돌아가시는 분들을 떠나보내다보니 저승사자 이즈 뭔들인가싶고

궁극적으로 죽음이 슬픔이상의 아픔으로

 여겨지는 나이가 되었다.



9988123이란 말이 있다.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하루 이틀 아프고 3일째에 죽는다는 건데 얼마나 좋은 작전인가?

어린 후배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3일만에 죽으면 어떻게, 가족들이 외국에도 있고 멀리 있어서 못올 수도 있는데 그래도 이별할 

시간은 줘야지.."라고

호통(?)을 치길래 그게 내 마음대로 되냐.....며 겨우 달랬다.


이제는 웰빙이 아닌 웰다잉(well-dying)의 시대란다.

삶과 죽음은 뗄 수 없는 관계인데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없다는 아이러니는

누구도 풀 수 없는 것 같다.


가브리엘이 만난 영혼 중 교통사고로 죽은 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을 친 가해자를 용서하지못하고 늘 1인 시위로 고생하는 이생의 어머니에게

" 내가 용서를 했으니 어머니는 이제 그만 쉬시고 당신인생사셨으면 좋겠다" 라고 전언한다.

여기서도 풀지못하는 걸 어찌 풀었을까

아직 가지않은 저 세상에서는 풀지못할 일이 없는 것일까


숨을 쉬고 있는 우리는 더 행복해야하는데 너무 악악거리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가브리엘은 어떤 환생을 선택했을까?

죽게 해달라고 그래 애원을 하고 결국 최선을 다해 창문에서 뛰어내린 할아버지는

후회하지않았을까?

그건 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어야겠다.



dream as if you will live forever,

live as if you will die tomo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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