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생을 여의고도...
꽃사월이 당도했다. 앞산 뒷산에 진달래 피고 뻐꾸기가 울던 고향 산천이 그리운 계절이다. 십 리 길을 걸어동무들과 등하굣길에서 만났던, 내 키보다 큰 진달래를 후려 잡고 진달래꽃 한 아름 따서 입에 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종종걸음으로 돌아왔던 추억이 남았다. 꽃사월의 추억 속에 또 다른 상실의 사월은 잊힌 채 살아왔다. 나의 꽃사월은 울음보를 터트린 기억과 어렴풋이 떠오르는 큰 고개에서 비보를 접했던 상실의 사월이 문득 아련하게 떠 오른다.
지금은 꽃사월 하면 벚꽃이 대표적이지만, 그때만 해도 벚꽃은 별로 없었다. 진달래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찹쌀 부침개 위에 장식처럼 올리기도 하고 술을 담그는 집도 있었다.
하굣길에 동무들과 진달래를 따다가 동무들은 입고 있던 치마폭에 한 아름 진달래를 담았는데, 나는 손에 한 줌 쥐고 화도 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동무들이 땀방울이 맺힌 상기된 얼굴로 한 줌씩 보태주면 울음보가 터져 엉엉 울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쑥 캐러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8살 그해 사월, 한 살 터울의 여동생 죽음을 맞이했다. 죽었다는 비보만 들었을 뿐, 흔적도 없이 여동생은 사라졌다. 이후 가족 누구도 그 죽음을 애도하거나 건드리지 않았다. 슬픔마저도 침묵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흘러 가끔 여자 형제가 셋이면 좋겠다 생각할 때가 있다. 오 남매 중 남자 형제가 셋이다. 남자 형제들은 만날 때만 형제지, 헤어지면 연락조차 없이 지내다가 명절이나 제사 때 만나면 서로 그동안의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다. 요즘은 다 그렇지 않을까, 간혹 우애가 남다른 형제들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다. 강산이 여섯 번이나 변하는 동안 한 번도 동생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도 하지도 않았다.
지난 주말 경주 남산 정강왕릉과 헌강왕릉 답사를 갔다. 입구 양쪽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를 보면서 갑자기 여동생 생각이 났다. 여동생은 그곳에서 어떻게 지낼까 새삼스레 궁금해졌다.
초등학교 등하굣길에 큰 고개와 작은 고개 두 개를 넘어서 걸어 다녔다. 큰 고개는 가파르게 동네가 보이는 꼭대기에 너른 마당처럼 평평한 쉼터가 있있다. 어른들은 시장 오가는 길에 쉬었다 가는 장소였고, 아이들은 그곳에서 동네를 바라보고 놀기도 하고 숙제를 하던 장소였다.
내가 입학하자 여동생은 학교에 가고 싶어 매일 큰 고개에서 하염없이 하교하는 언니를 기다리곤 했다. 그러기를 한두 달이 지난 사월 어느 날, 큰 고개에서 할머니가 두 다리를 뻗고 통곡하고 계셨다. 할머니는 삼랑진 이모할머니 댁에 가셨는데, 이모할아버지가 삼랑진역장이라 연락이 빨리 닿아 서둘러 내려오셔서 동네가 보이는 그곳에서 울고 계셨던 거였다. 동생 밑에 남동생이 태어나 할머니 사랑을 독차지했다. 여동생 죽음은 할머니에게 큰 슬픔이었다. 그때는 철부지여서 그 죽음의 슬픔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지금 같으면 심한 독감처럼 가벼운 맹장염이었는데도 당시는 죽을병이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병원이라도 가봤을 텐데,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 이후 엄마의 마음이야 오죽했겠냐만, 우리는 아무도 그 죽음의 슬픔을 들추지 않았다. 잊힌 채로 살아왔다. 며칠 전 진달래와 무덤을 마주하면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여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꽃사월이 가기 전에 엄마를 앞세우고 진달래 한 아름을 따다가 동생이 잠든 그곳으로 가서 안부라도 전하고 싶다.
왜 그동안 무심히 잊고 살았을까?
지난 토요일, 경주 남산에 널려 있는 진달래꽃은 어릴 적 색채는 아니었다. 유난히 색채가 곱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진달래를 한입 물고 천진난만한 시절을 보냈던 기억을 더듬어, 꽃사월을 맞아 잠시 고향의 추억과 여동생의 상실감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