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의 식집사

by 서지원

7평 남짓한 작은 원룸이 아침부터 분주하다. 회사 점심으로 가져갈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서다. 폭신한 감자 치아바타를 반으로 숭덩 잘라 예열시킨 프라이팬에 던져 놓는다. 빵이 노릇해지길 기다리는 사이, 나는 재빨리 텃밭으로 뛰었다.


사실 '뛴다.'라고 말하기도 멋쩍다. 집 안에서 두세 걸음이면 닿는 흰색 철제 선반 한 켠, 그 위에 수경재배 중인 바질과 루꼴라가 있다. 식물등을 켜고 푸릇한 잎을 훑어본 뒤, 제법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자란 녀석들만 톡톡 뜯어 챙겼다.


그렇게 만든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 씹으며, 지금 글을 쓴다.




자연이 멀어진 거리에서

내가 나고 자란 동네는 서울임에도 중심지와는 꽤 먼 베드타운이어서 자연이 가까이 존재했다. 집에서 5분만 걸으면 작은 공원이 있었고, 잘 조성된 하천엔 이름 모를 큰 새와 오리도 머물곤 했다.


직장 때문에 강남에서 자취를 시작하며 집 안에 식물을 들이게 된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빼곡한 고층 빌딩과 까만 아스팔트 바닥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심에서, 나는 어떻게든 초록을 보고 싶었다. 울창한 숲은 아니더라도 작은 화분 하나쯤은 곁에 있어야 숨이 트이는 듯했다.


오래된 친구, 아랄리아

현재 우리 집엔 총 3개의 식물들이 있다. 그중 가장 내가 애착을 느끼는 것은 아랄리아 나무다. 가장 오래 키운 식물인 만큼 추억도 많이 쌓였다.


생일을 맞이하여 소영과 태린이 선물로 보낸 것이 첫 만남이다. 가늘고 뾰족한 잎을 가진 아랄리아는 본연의 매력이 확고했다. 인간으로 치면 마르고 비리비리한 모습이라 오래갈까 싶었는데... 웬 걸, 겉보기와 달리 녀석은 강했다.


한 번은 이사하면서 아랄리아를 차 뒷자리에 직접 싣고 운반한 적이 있다. 문제는 7월, 찌는 듯한 여름이었다. 차 안에 두 시간 가까이 방치된 아랄리아는 완전히 시들어 있었다. 뜨거운 물에 데친 듯한 잎들이 축 늘어진 모습을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극심한 조급증에 시달리며 찬물 샤워를 시키듯 잎을 적셨다. 뿌리에 새 흙도 사서 채웠다. 이틀쯤 지났을까. 아랄리아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새 집에서 다시 생기를 찾았다. 내 실수를 슬쩍 눈감아 준 셈이다.


슬기로운 수경재배 생활

내가 수경재배를 시작한 건 재작년부터다. 계기는 우연히 본 유튜브 영상 하나였다. 영상 속 유투버는 수경재배 키트를 이용해서 집 안에서 채소를 기르는 방법을 소개했다. 생각보다 간단한 과정이 용기를 줬다.


주문한 키트와 바질, 루꼴라, 상추 씨앗이 도착했다. 건조된 그로단을 블록형태로 자르고 물에 적시면 축축한 이끼처럼 변한다. 그로단을 구멍에 넣고 씨앗을 3개씩 뿌린다. 플라스틱 통 가득히 찬물을 채워준다. 작은 창뿐인 원룸이라 빛이 부족할까 봐 식물등도 설치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단순하다. 밤새 푹 자고 아침마다 식물등을 켠 채 관찰한다. 어느 날은 아주 작은 싹이 돋고, 그다음 날엔 조금 더 솟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잎이 몰라보게 크고 무성해진다. 매 번 볼 때마다 조금씩 성장해 있는 생명에 나는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비싼 돈을 주고 산 작은 잎채소가 냉장고 안에서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일은 이제 끝이다. 내가 직접 길러낸 바질과 루꼴라는 언제나 살아있다. 필요한 만큼만 뜯어가면 어느새 내게 새 싹을 보여줄 것이다. 그 과정은 종종 사회생활 하는 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적당히 아프고 견뎌내면 성장했다.


결국 식물을 돌보는 일은 내 안의 무언가를 돌보는 일처럼 느껴진다. 매일 물을 주면서 사실은 나 자신을 열렬히 응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모님에게 완전히 독립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처럼 돌봄 당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니 웃긴다. 나도 아직 덜 큰 셈이었다.



1. 크리스마스에 트리를 대신한 아랄리아


2. 여우꼬리 선인장의 귀여운 자구


3. 발아중인 루꼴라와 바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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