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회복 기간에 들어갑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나의 새 인생이 시작됐다. 그동안 학교생활에 찌들어 잊고 있었던 행복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나는 자퇴 노트에 계획한 대로 자퇴 첫날부터 부지런하게 하루를 보냈고, 열심히 살아온 결과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제법 훌륭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책을 펼친 순간부터 이미 예상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매일매일 계획대로 살아가고 나를 제어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위치와는 아주 많이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지금 이런 책을 쓰는 대신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라는 자서전을 쓰고 있었을 수도 있겠지.
하여간 나의 자퇴 후 생활은 그리 파란만장하지는 않았다. 나를 괴롭게 만드는 주원인에서 탈출했기 때문에 당장의 고통과 자살 충동은 덜어졌지만, 자퇴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부모님과 겪었던 불화와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 앞으로 혼자 헤쳐나가야 할 미래에 대한 걱정 등이 쌓여 절로 한숨이 나왔다.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당장 자퇴한 다음 날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 공부를 하고 글을 쓰며 일과를 충족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퇴 다음 날은 어찌어찌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글을 썼다. 그러나 이튿날부터 나의 계획은 완전히 망가졌다. 기존 수면 시간을 지키는 대신 새벽 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자고, 해가 중천에 뜰 즈음에야 일어났다. 하루에 8시간을 넘게 컴퓨터 앞에 앉아있어도 글 한 줄 제대로 못 쓰는 날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절망했고, 자책했고, 자퇴 후에도 열심히 살 거라고 당당하게 외쳤으면서 가족들에게 한심한 모습밖에 못 보여주는 내가 부끄러웠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게을러서, 몸이 안 따라줘서 계획대로 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어하는 나를 이해하고 돌봐주는 대신, 나는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할까. 왜 이렇게 게으를까하고 나를 채찍질하기만 했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해내지 못하면 절망에 빠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자퇴를 한 것이 2017년 11월, 봄이 오기 전까지 겨울 내내 집안에만 있었다. 햇빛을 받지 못해 우울해지는 계절이라고 하는데 집에만 있으니 상태가 더욱 좋지 않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평일에는 엄마랑 아빠와 함께 외출을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집에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정확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뭐라도 쓰고 찾아보고 해야겠으니 창을 켜놓고 모니터만 보는데, 흰 백지의 한글 창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멍해졌다. 그때는 정말 내가 뭘 써야 하는지, 뭘 쓰고 싶은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내가 제대로 글을 쓰거나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고 매일 집안에만 있으니, 처음에는 가만히 지켜만 보던 부모님도 답답해하셨다. 그렇게 지낼 거면 왜 자퇴를 했냐고, 차라리 다시 학교로 돌아가라는 말도 들었다. 한숨을 내쉬고 욕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 험담을 늘어놓으며 하소연을 털어놓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며 화를 삭였다. 가끔은 말다툼도 하고 화도 냈지만, 나도 이런 내가 싫어 끝엔 속상해하고 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자꾸만 우울한 생각이나 걱정을 하게 되어서, 이불이나 베개가 눈물로 축축해지기도 했다.
자퇴 후에 맞이한 현실은 내 예상보다도 더 힘들고 울적했다. 결국 남들이 걱정하고 예상한 것처럼 나 역시 하릴없이 놀고먹기만 하다가 후회하는 게 아닐까 두려워졌다. 산더미처럼 불어나기 시작한 불안감은 나를 집어삼켰고, 이대로 가다간 계획대로는커녕 일상생활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스스로를 망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기 전 2월, 나는 학교에 다닐 적 만나 뵈었던 청소년동반자 상담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내가 자퇴할 수 있도록 계획을 함께 짜주시고 다양한 연계 센터 등을 소개해주시며 종종 연락을 이어가고 있던 분이셨다. 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나누면서, 이제 슬슬 검정고시를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학업중단숙려제 기간을 거쳤을 때, 해당 꿈드림 센터에서 자퇴 후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지만 따로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선생님은 센터 측에서 아직도 연락을 주지 않았냐며, 화를 내시면서 당장 꿈드림 센터에 연락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꿈드림 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그사이에 담당 선생님이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선생님이 오셔서, 인수인계를 할 때 누락이 된 모양이었다. 3월부터 검정고시 준비를 위한 멘토링과 수업이 시작되니, 자세한 사항은 센터에 직접 와서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답을 받고 전화를 마쳤다. 아침 일찍 병원을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전화를 끝내고 나니 어쩐지 발걸음이 더 가벼워졌다.
2018년 열여덟의 봄. 나는 우울과 무기력과 이별하기 위해 일어서기를 택했다. 이제 더 이상 집안에 틀어박혀 스스로를 가두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무언가를 시도하고 열심히 살아갈 만큼의 기력은 없었지만, 적어도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을 시도하면서 천천히 변화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우선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큰 산을 넘은 후에, 진정으로 자퇴하고 나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그렇게 다짐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마침내 나는 긴 우울에서 벗어나 회복 기간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우울과 5년째 동거 중입니다>는 주 1~2회 연재로 이루어집니다.
행복을 찾기 위한 여정에 함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