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보다 책이 좋으니까
30일 글쓰기는 매일 아침 6시에 그날의 주제가 공개됩니다. 그래서 주어진 주제에 따라 글을 쓰는 것이지요. 혼자 제약 없이 글을 쓸 때는 생각지도 못한 주제들이 공개되기도 하고, 그날 밤 12시까지 마감이라는 제한이 글쓰기의 근육을 키워주기에 글쓰기의 습관을 형성하고 싶은 분들에게 강추하는 시스템입니다^^ 질보다 꾸준히 양을 늘리는 게 중요하다고 하는데, 매일매일 새로운 주제에 맞게 글을 쓰다 보면 저도 어느덧 글쓰기 실력이 늘어나겠죠?
오늘의 주제는 Q. 나는 어디에 위치해 있습니까.
얼리어답터 : 남들보다 일찍 사용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일반 대중 : 얼리어답터의 반응을 보고 구입
느림보 : 어지간해서 신제품을 구입하지 않는 사람
매일매일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나를 찾아옴으로써 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30일 글쓰기 모임이다. 나는 어떤 유형일까? 결혼 전에는 '일반 대중'이었을지 몰라도 결혼 후에는 '느림보'가 된 것 같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는 결혼 후 악착같이 돈을 아끼면서 살았다. 버는 게 나은 거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 사정으로 아껴사는것이 나에게는 최선이었다. 그 정도가 좀 심해서 이제는 여행도 다니고, 누리고 살자~라고 변하고 있지만 말이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돈에 대한 압박이 너무 싫었다. 학교에 내야 하는 여러 가지 돈들을 제때 내지 못하는 것은 임원으로서 자존심에 스크래치 나는 일이었다. 내가 걷는데 내가 내지 못하는 심정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장사를 했던 집 아이들은 그렇게 돈이 쪼들리지 않는 반면, 농사를 짓는 집들은 그 해가 풍년이냐 흉년이냐에 따라서 집에 돈이 넉넉하던지 씨가 마르던지 했다. 매일매일 일을 해도 돈이 없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닌 나는 중간에서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제일 고생한 것은 부모님이시고, 또한 언니와 오빠는 어린 시절에 나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등 나보다 더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내딸인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돈을 쓰지 않고 모으는 습관이 들었던 것 같다. 바지 무릎을 덧대어 입거나, 양말을 꼬매 신는 것은 일상이었다. 하물며 마론인형에게 한 벌 뿐인 드레스 외에 뭔가 옷을 입히고 싶은데 여의치가 않으니 양말, 장갑, 어떨 때는 속옷으로도 인형 옷을 언니가 만들어줬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 얘기한 것들은 다 과거의 이야기들이다. 어려웠던 시절이 지나고 나서 다른 식구들의 행동은 바뀌었다. 그런데 나의 행동은 한결같다. 결혼 이후에는 악착같이 빚을 갚았고, 또 다음 전세를 갈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으고 모으다 보니 신제품을 살 여력이 없었다. 아니 사면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충분히 집에 있을 것이 다 있는데 신제품이 갖고 싶다는 것은 필요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욕구에 의한 것일 것이다. 내가 어떤 새로운 물건을 사면 기존에 것이 대체되고 버려지기 마련이므로 나는 '느림보'가 답답한 것이 아니라 지구를 살리고, 삶을 간결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꼭 돈이 들어서라기보다는 굳이 얼리어답터가 될 생각조차 없다.
이제는 그렇게 허리끈을 졸라매지 않아도 될 정도이지만, 습관은 무섭다. 허투루 돈을 쓰면 속이 상하다. 물론 가족들에게 쓰는 돈은 과감하게 쓰는 편이다. 다만 나에게 매정할 뿐... 하지만 뭐든지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이 살면서 터득되어진 지혜이다. 그래서 이제는 적당히 나에게도 쓰고, 여행도 가려고 노력 중이다. 아직도 손은 떨리지만.
어지간해서 신제품을 사지 않는 '느림보'이지만, 책은 빨리 과감하게 산다. 나에게는 어떤 물건보다도 책이 소중한 요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