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끝-이성복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그 여름의 끝』, 이성복, 문학과지성사(1990.06.01)
그 가을의 끝
그 가을 단풍나무는 무사하였습니다 몇 번의 비바람에도 그 다음 서릿발에도 쓰러지지 않아 붉은 잎들을 마지막 불꽃처럼 매달았습니다
그 가을 나는 낙엽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가을 나의 그리움은 장난처럼 붉게 물들었지만 여러 번의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흩어지며 타오르는 단풍 마지막 숨결을 불꽃으로 피워 올릴 때 두어 평 좁은 뜰이 붉은 눈물로 덮였습니다 장난처럼 나의 그리움은 그제야 고요히 흩날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