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임영조
12월
올 데까지 왔구나
막다른 골목
피곤한 사나이가 홀로 서 있다
훤칠한 키에 창백한 얼굴
이따금 무엇엔가 쫓기듯
시계를 자주 보는 사나이
외투깃을 세우며 서성거린다
꽁꽁 얼어붙은 천지엔
하얀 자막처럼 눈이 내리고
허둥지둥 막을 내린 드라마
올해도 나는 단역이었지
뼈빠지게 일하고 세금 잘 내는
뒤돌아보지 말자
더러는 잊고
더러는 여기까지 함께 온
사랑이며 증오는
이쯤에서 매듭을 짓자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입김을 불며 얼룩을 닦듯
온갖 애증을 지우고 가자
이 춥고 긴 여백 위에
이만 총총 마침표 찍고.
― 『흔들리는 보리밭』, 임영조, 문학사상사(1996.10.10)
12월
네 번의 계절이
각자의 얼굴로 곁을 지나갈 때
나는 묵묵히 버텨온
내 어깨를 다독인다
끝을 재촉하는 잔인함
돌아볼 틈을 주는 다정함
12월은
두 얼굴로 나를 품는다
지우지 못한 얼룩은
쌓이는 눈 아래 묻어두고
묵은 상처 덮으며
그림자와 화해한다
마침표와 시작이 맞닿은 자리
빈손이어도 괜찮다
끝은 곧
새 길의 문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