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동네는 북아현동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4층짜리 다세대주택 2층에 살다가 여덟 살이 되면서 같은 건물 반지하로 이사했다. 집주인이 전세금을 올려달라고도 했고 엄마가 수선집을 하기에 더 좋은 곳은 길가에 인접해 있는 반지하였기 때문이다. 수선집에서 나와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 거대한 92개의 계단이 나왔다.
한숨을 길게 한 번 푹 쉬고 열심히 뛰어올라가도 한 번에 다 오를 수 없던 그 계단. 우리 동네에서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선 모두 그 계단을 올라야 했는데, 계단 아래에서 보면 알록달록한 책가방을 멘 아이들이 올라가는 모습이 마치 게임 화면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끔 저 아래에서 엄마나 할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면 올라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며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외할머니는 우리 동네에서 떡볶이집을 하셨다. 나는 바로 떡볶이 수저였던 것이다. 학교 끝나고 92개의 계단을 와다다다 뛰어내려 가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보이던 할머니네 집이자 분식집. 할머니 나왔어~! 하면 초록색 멜라민 접시에 한 그릇 가득 담아주시는 기다란 밀떡볶이를 맛있게 먹었다.
할머니만의 비법 소스가 뭐였는진 모르겠지만 다른 떡볶이집과는 달리 살짝 검붉은 색깔에 매콤 달달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나던 말캉말랑한 할머니의 떡볶이. 떡볶이를 다 먹고 나면 가게 안쪽에 딸린 방으로 들어가서 할머니가 떼던 떡볶이 떡을 이어서 한 줄씩 떼곤 했다. 떡을 다 떼고 나면 다시 책가방을 메고 룰루랄라 뛰어서 집으로 갔다.
딸랑거리는 수선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옷먼지들이 부옇게 허공을 떠다녔다. 수선하러 온 손님들은 다 동네 아주머니들이셨는데, 자주 오시는 손님들은 보일러 아줌마, 곰돌이 아줌마, 사과집 할머니였다. 안녕하세요~! 씩씩하게 인사를 하고 수선집 안에 딸린 우리 집으로 들어가서 간식을 챙겨 먹고 엎드려 누워 숙제를 했다.
월요일이면 KBS2에서 해주던 원피스 만화를 보고, 일요일이면 2시에 해주는 이누야샤 만화를 보면서 엄마가 해주는 김치전을 먹었다. 나와 동생이 일주일 중 가장 고대하고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동생과 나는 아직도 그때 만화 보며 먹는 김치전 맛이 꿀맛이었는데! 하면, 정작 엄마는 맨날 똑같은 간식만 해줘서 미안했다고 한다.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치전을 매주 먹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는데.
이누야샤를 다 보고 나면 밖으로 나가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았다. 유선이, 유선이 동생 찬우, 혜원이, 혜원이 동생 석우, 유라, 유라 동생 보라, 내 남동생까지. 우리는 매일 어울려 놀던 동네 꼬마들이었다. 경찰과 도둑, 얼음땡, 땅따먹기, 소꿉놀이, 고무줄놀이 등 놀거리는 많았다. 하루는 엄마가 수선집 문 옆에 커다란 비닐 천막을 씌워서 아지트 같은 공간을 만들어줬다.
아늑한 비밀공간에 환장하던 시절이라 속으로 너무너무 좋았었는데, 나 말고 친구들이 먼저 들어가 버려서 마음이 단단히 상해버렸다. 삐진 티를 팍팍 내며 꿍해 있자, 엄마가 기껏 해서 힘들게 만들어줬는데 왜 심통이냐며 천막을 다 걷어서 치워버렸다. 만들어지자마자 철거된 나의 아지트여..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속상하고 후회되는 마음 가득이다. 그냥 친구들이랑 다 같이 들어가서 재미나게 놀걸..
지금은 재개발이 되어 92개의 계단도, 분식집이었던 할머니네 집도, 수선집이었던 우리 집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엔 커다란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섰다. 나는 그 수선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취업을 할 때까지 살았다. 주거용 공간이 아니라 화장실도 없어서 정말 너무너무 불편하고 때로는 치가 떨리게 싫었던 그 반지하 수선집.
커다란 방 하나를 얇은 판자로 분리한 작은 내 방에서 나는 정말 많이도 울고 웃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갈래?라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놉!이지만, 지금 이렇게 그때를 찬찬히 되돌아보니 반짝거리는 추억도 참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따뜻했던 나의 동네, 나의 유년시절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