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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경 4시간전

만약 타임워프가 가능하다면

할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고

틈만 나면 할머니를 두들겨 팼다.

할아버지가 도박과 술에

없는 살림을 거덜 내는 동안

할머니는 장사, 파출부 등 안 해본 일 없이

홀로 7남매를 먹여 살렸다.


7남매 중 막내였던 엄마는

9살에 갑자기 고열에 시달렸다.

병원에서는 감기 치료만 해주고 보냈다.

할머니는 제대로 치료해 달라고 말할

배짱도 돈도 없었다.


소아마비로 인한 하지 부동.

엄마의 양쪽 다리는 1.5센티 차이가 난다.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학교에 가면

애들이 병신이라며 하루 종일 놀려댔다.

매일 울면서 집에 돌아온 엄마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않기로 한다.


집에서 할머니의 일을 돕다가

열다섯이 되자 언니를 따라

미싱 공장에 취직했다.

스물다섯에 중매로 아빠를 만나기 전까지

엄마는 10년 동안 미싱 공장에서 일했고,

결혼하고는 20년간 수선집을 했다.


엄마가 만약 9살 때 병원에서

소아마비 치료를 제때 받았더라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나는 그때 병원의 모습을 자주 상상했다.

내가 그 의사에게 말해줄 수만 있다면,

엄마는 병명은 감기가 아니라 소아마비라고.


제때 치료를 잘 받고 건강해진 엄마는

무사히 고등학교까지 졸업한다.

밤이면 밤마다 보던 좋아하는 영화를

더 깊게 공부하고 싶어 진다.

대학에 갈 형편은 되지 않으니

영화 촬영 현장 스태프 일을 시작한다.

현장 경험을 쌓은 엄마는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 시나리오를 쓴다.


할머니의 중매를 한사코 거절한 엄마는

영화 일을 하며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가슴 절절하고 애틋한 사랑과 이별을 겪고,

그 경험을 발판 삼아 쓴 시나리오가 성공한다.

결혼은 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만끽한다.


휴가 때는 친구들과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하고

틈만 나면 혼자 해외여행도 나가서 즐기고

해외 영화제에도 초청받아 참석한다.

어릴 때 좋아하던 리처드 기어도 만나고

조지 클루니도 만나서 악수한다.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도 다 가진 엄마는

인생을 돌아보며 정말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운 인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도 정말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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