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친구들 사이에선 우리 집이 제일 가난했다. 새 학년 새 친구들과 지난 경험을 나눌 때마다 알게 된 건, 친구들에겐 당연하게 누려오던 일상이 나에겐 미지의 것들이었다는 거다. 학기 초마다 담임 선생님과 하는 면담에서 나는 “선생님, 저희 집 형편이 좀 어려워서요. 급식비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학생이었으니까.
조회시간이 끝나고 급식지원 쿠폰을 받기 위해 따로 복도로 불려 나갈 때마다 다른 친구들이 알아챌까 봐 조마조마했다. 수련회나 수학여행 계획이 잡히면 설레는 감정보다 초조함이 앞섰다. 엄마는 분명 한숨을 쉴 텐데. 그리고 나에게 묻겠지. “꼭 가고 싶니?”
학년이 올라갈수록 우리 집의 가난을 깨달을 수 있는 일들은 더욱 많아졌고,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먼저 체념하는 법을 알아갔다.
고등학교 졸업도 전에 취업을 하고 22살에 야간 전문대학에 입학했다. 일을 끝내고 저녁 먹을 시간도 없이 학교에 가서 밤 10시까지 공부해야 했지만 나는 처음 해보는 대학 생활이 좋았다. 처음 생긴 대학 동기들도 생경하게 좋았다. 마침 그 무렵 국가장학금이 처음으로 시행되었는데, 나는 당연히 첫 입학금을 빼고 나머지를 다 지원받았다. 다시 한번 우리 집의 가난이 실감되던 순간이었다.
근데 동기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좀 의아했다. 장학금을 얼마 받지 못했다고 해서 당연히 우리 집보다 형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나와 비슷하거나 더 어려운 친구들도 있었다. 장학 재단의 소득 분위 산정 기준에 의문이 생겼지만, 그것보다도 내가 진짜 궁금했던 건 좀 다른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찢어지도록 가난했던 건 아니었나?
그 사실을 처음 인지하던 순간의 충격이 떠오른다. 생각해 보니 우리 집은 집도 차도 없고, 돈도 없었지만 빚도 없었다. 엄마 아빠는 매일 돈이 없다 했지만 진짜로 돈이 없어서 밥을 굶은 적은 없었다. 적긴 했어도 아빠가 매달 막노동을 해서 벌어오는 월급과 엄마가 수선 일로 번 돈이면, 어쩌면 다른 외벌이 집들보다 나았을 형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생각해 보니까 우리 어렸을 때 그렇게 입고 먹을 돈도 없을 정도로 가난하진 않았던 것 같아. 근데 나는 왜 맨날 돈이 없어서 허덕이던 기억밖에 없지?”
“몰라서 그랬지 뭐. 돈 쓸 줄을 몰랐어. 벌고 아낄 줄만 알았지. 너랑 네 동생 좋은 옷도 못 입히고 맛있는 것도 못 먹이고 그렇게 미련하게 살았어.
그 반지하 방에도 그렇게 오래 살 필요 없었는데, 수선해서 얼마 벌지도 못했어. 동네 장사라고 아줌마들이 하도 깎고 그래서. 너 아토피 심해진 거 다 그 집에서 옷 먼지 많이 마시고 그래서인 거 같애.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속상해.”
나는 엄마에게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맘속에선 ‘엄마도 과거에 우리가 그렇게까지 살 필요는 없었다는 걸 느끼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우리 집은 정말 지독할 정도로 아끼며 살았기 때문에.
반지하라서 한낮에도 방이 어두웠지만 저녁이 되기 전까지 웬만해선 불을 안 켰다. 오래된 에어컨이 있었지만 없는 여름을 살았고, 보일러가 있었지만 없는 겨울을 살았다. 우리 집에서 전기나 가스가 허투루 낭비되는 일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집에서 밴 투철한 절약정신은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도 발휘됐는데, 친구네 어머니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냥 그런 순간들이 머릿속에 다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살던 반지하 집은 가정집 용이 아니라 미싱 공장용으로 만들어진 곳이어서 제대로 된 부엌도 화장실도 집안에 없었다. 집 밖으로 나가 골목을 돌아들어가야 화장실이 나왔는데, 그 화장실엔 언제나 꼽등이와 거미와 온갖 날파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가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생리현상을 최대한 괴로울 때까지 참고 또 참았다가 억지로 가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옷 먼지 가득한 거실을 지나 합판으로 분리한 한 평짜리 작은 내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수선 일로 바쁜 엄마를 대신해서 설거지 등 집안일을 다하고 나서 내 공부를 했다.
그렇게 열악한 반지하 집에서도 십 년간 계속 버티며 살 수 있었던 건, 엄마가 수선 일을 해야만 우리가 지금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다는, 다른 선택지는 없다는 엄마의 말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밤낮없이 미싱을 돌리고도 엄마의 수중엔 남는 돈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나는 엄마 아빠가 그 시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나와 남동생을 키워냈다는 것을 안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 걸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에 가진 것 하나 없던 그들도 남들 다하는 그 당연한 것들을 했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 엄마 아빠를 원망해 본들 바뀌는 것도 없을뿐더러 서로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만 남기겠지. 머리론 이렇게 다 정리가 됐는데도, 그 무렵 엄마 아빠를 볼 때면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왔다. 내 맘속에 살던 괴물이 자꾸만 소리쳤다.
‘그렇게 가진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었으면 우릴 낳지 말았어야지. 왜 우리를 맘대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온갖 상처를 받으며 자라나게 해? 그래 놓고 이제 와서 후회하면 다야?’
같이 드라마를 보다가 엇나가는 자식 때문에 속 썩어하는 부모 이야기를 볼 때면 엄마는 늘 ”아유~우리 애들은 저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알아서 잘 커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라고 했다. 그전엔 나도 “그렇지~ 우리가 좀 잘 컸지? “ 하고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때는 그런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우리가 알아서 잘 컸다고 했지만, 자식은 결코 알아서 잘 자라나는 무엇이 아니다. 가난한 부모가 낳은 자식은 부모들과 같은 가난한 환경 속에서 원치 않는 상처를 받으며 자라난다. 모른 체하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생채기 많은 삶을 산다.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난 때문에 겪었던 일들 중 어느 하나라도 잊어버린 게 없다. 너무너무 잊고 싶은데 잊히지가 않는다.
가난했던 엄마 아빠에겐 죄가 없지만,
가난에겐 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