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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해 Feb 18. 2021

세상이 무너져도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 정세랑 유니버스

정세랑, <피프티 피플>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관용구는 거짓말이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삶의 충만함은, 점차 세상을 마주하며 내가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빠르게 줄어든다. 특별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들과 같지 않거나 남들보다 모자라서 가진 약점들은 나이가 들수록 더 불리하게, 잔인하게 돌아온다. 나의 성별로, 성 지향성으로, 인종으로, 소득으로, 지역으로, 신체로…. 나는 우위를 점해 여유로워질 수도, 불리한 처지에 놓여 한층 예민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남들보다 약점이 많은 사람은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더 고단하고 소모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다.




지금껏 소설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타고난 매력을 가득 뽐내며 세상을 멋지게 구하거나 아니면 지독한 불행 포르노를 부각하며 주인공이 가진 약점으로부터 발생하는 비극성을 극대화하거나 한다. <피프티 피플>에는 주인공이 없으면서, 50명이 넘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어떤 인물들은 크고 작은 재난, 그로 인한 비극을 겪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재난, 열악한 직업 환경 때문에 발생하는 재난, 질병이나 생활환경으로 인해 끊임없이 투쟁 상태에 놓이게 되는 재난 등등.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그런 여러 사람들이 한데 모여 화재에서 대피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챕터 내내 일상생활조차 불가능하고, 누군가는 행복하고 완벽한 챕터를 가져간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 이 이야기 자체가 거대한 인생의 한 부분들을 담은 것을 알게 된다. 인생의 일부분을 떼어 본다면 행복한 챕터일 수도, 불행한 챕터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영원한 불행과 절망은 존재하지 않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된다.



정세랑은 세상이 아름답고 온전하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불완전하고 불합리한 세상이어도 더 옳은 것, 더 나은 것을 선택하는 신념은 얼마나 빛나는지, 그리고 그 신념을 지닌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에서 오는 위안과 연대의 힘은 또 얼마나 강력한지 이야기한다. 올해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읽은 책인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시작으로 해서, <보건교사 안은영>, <지구에서 한아뿐>을 연달아 읽었다. 그리고 이번에 <피프티 피플>을 읽으며 '정세랑 유니버스'를 더욱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정세랑 유니버스’에서의 인생은 다채롭게 엉망진창이고, 나는 상처가 가득해 너무 지쳤고, 지구가 망했고, 외계인에게 납치당하거나 스토킹 당해도, 그럼에도 씩씩하게,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살아나간다. 




 여성으로서 이입할 수 있는 주인공이 너무도 빈약하던 소설과 영화의 세계에 여성 서사라는 하나의 갈래를 틔우고 퍼져 나가는 움직임이 오랜 시간 천천히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는 다양한 여성상이 지금처럼 풍요로운 적이 없었고, 앞으로는 여성 서사라는 말도 새삼스러울 정도로 자리매김할 것이라 믿는다. 꾸준한 출판으로 그 선두를 달리는 정세랑 작가를 드디어 다루게 되었다. <피프티피플>은 여성 서사, 라 칭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감이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당신을 닮았기를, 당신의 목소리로 말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옆자리의 퍼즐처럼 가까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는 작가의 맺음말처럼 읽는 사람이 이입할 수 있는 다양한 여성상을 제시한다. 아동, 청년, 중년, 노년의 인물들이 다양한 삶의 모습과 배경을 가지고 등장해 누구에게라도 마음이 쏠리게 되고, 그 인물들이 유기적으로 얽히면서 오는 소설의 순수한 재미까지 갖추고 있다. 밝은 듯하지만, 공황장애와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예민한 사람 배윤나와, 자신이 가진 힘을 여성들을 돕는 데에 발휘하는 이설아의 이야기가 유독 와 닿았다. 나와 닮은, 예민함으로 세상을 직시하고 아파하는 인물을 보는 것 자체가 위로였고, 그럼에도 내가 그 예민함마저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자체가 모순인 경멸하고 사랑하는 나의 세상에서, 무던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과 그러고 싶지 않은 모순을 가득 안고 살아갈 것이다.



사진: 스티븐 유니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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