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풍의 바흐 5번, Bachianas brasileiras no.5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새마을 운동과 함께 사물놀이와 같은 민속음악을 저속한 미신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반면에 우리와 비슷한 환경을 경험한 독재 치하의 브라질에서는 국민음악이 탄생했다.
재즈는 유럽에서 온 백인들이 식민지로 만든 아메리카 땅에 노예로 잡혀 온 흑인들의 음악이다. 아프리카를 근원으로 하는 흑인들의 음악과는 아주 다른 모양의 음악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영적 지도자 예수가 유럽으로 건너간 제자들에 의해 기독교라는 종교로 재탄생하고, 인도 출신의 영적 지도자 부처의 제자들이 만든 불교는 중국에서 번성한다. 인류의 문화라는 건 그렇게 섞이고 변형되며 발전해왔다. 종교는 물론이고 음악과 사고방식까지 마찬가지의 과정으로 이어져 역사가 된다.
보수적인 사고방식으로 보면 토속 문화란 그 땅에서 만들어지고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문화의 뿌리가 언제나 '그곳'에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 어떤 토속 문화라도 진정한 의미의 토속 문화인 것은 없는 셈이다.
중요한 건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이또르 빌라 로보스Heitor Villa-Lobos는 '나는 토속 문화를 '사용'한 적이 없다. 내가 바로 토속 문화다'라고 말했다. 정확하게 어떤 상황에서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토속 문화라는 편견에서는 확실히 벗어난 생각이다.
빌라 로보스는 브라질에서 태어났지만 브라질 원주민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에서 이민 온 도서관 사서였으며 아마추어 음악가였다.
그가 만든 음악은 아마존과 같은 원시 부족들로부터 얻은 영감에 기초하는 게 많다. 또 재즈처럼 여러 가지 문화적 충돌이 만든 브라질(원주민이 아닌) 토속 음악인 쇼로choro에서부터 시작하고 발전한다.
쇼로는 재즈와 비슷한 탄생 배경을 가진 음악이다. 브라질에 자리 잡은 흑인들과 유럽 음악이 만나고,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원주민 문화와 섞이며 탄생한 음악인 것이다. 재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쇼로가 몇몇 전문 음악가들의 손에서 완성되었다는 점뿐이다. 작곡가들의 손에서 만들어져서인지 브라질이라는 환경이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쇼로는 재즈보다 부드럽다. 단지 부드럽다기보다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다르다는 느낌이다. 재즈에 비해서 조금 초연한 듯한 쇼로 음악은 남미의 다른 음악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우울함이 섞인 열정을 품고 있다.
[참조]•Escola Alegria, 임도영이 소개하는 브라질 음악 <2. 춤추는 바흐, 쇼로 음악>
빌라로보스는 정통 클래식 작곡을 공부한 인물이라고 하기 어렵다. 리우데자네이루의 국립 음악원에 들어갔지만, 자신이 말한 것처럼 '대학은 거기에 한 발을 내미는 순간 최악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배운 것은 그의 음악에 순기능을 하지는 못한 것 같다.
전문교육을 받지 못했던 수많은 천재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만의 음악을 발견하고 만들었다. 그의 음악적인 아이디어는 기가 막히게 독창적이어서 독일 출신 음악가 바흐의 음악을 브라질 음악인 쇼로와 섞어 크로스오버적인 구성과 음색을 만들어냈다.
대중음악과 클래식 음악의 가장 큰 차이라면 구성과 조직이 아닐까 한다. 신이 영감으로 들려주는 음악을 받아 적는 데는 기술이 필요한 법이다. 그 기술은 하나의 필터로 작용하고 그 차이에 따라 결과는 더욱 달라진다. 다분히 구조적인 클래식 음악은 그래서 작곡가의 기술-필터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보이곤 한다.
반면에 작곡기법과 형식이 하나의 틀로 완성되고 나면, (이를테면 소나타처럼) 형식을 지키느라 개성이 희석되는 현상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런 제한적인 상황이 '비슷비슷한' 음악을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곤 한다. 따라서 개성 강한 클래식 음악을 만드는 건 상대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브라질은 다른 식민국가들과는 다른 독특한 역사를 가진 나라다. 포르투갈의 왕이 전쟁에서 지고 국가를 전부 식민지 브라질로 이동했다. 왕은 나중에 다시 포르투갈 본국으로 돌아가지만 그 아들이 브라질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이어간다. 식민지가 본국이 되었다가 왕이 바뀌며 다른 왕국이 된 것이다.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주인이 되었든 큰 차이가 없는 일이지만, 미국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주인은 본국에 뿌리를 뒀지만 그로부터 독립한 새로운 국가가 된 셈이다.
빌라 로보스는 그런 브라질의 영웅이다. 독재 시절 정권과 밀착한 그는 나중에 고액권 화폐에 초상화가 사용될 정도로 국가적인 인지도가 있었다.
브라질에 대한 자존심이 대단했던 빌라 로보스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과의 인연으로 유럽에 알려지게 된다.
두 사람의 만남은 대단히 극적이어서 마치 영화 같다. 1918년에 브라질을 방문한 루빈스타인을 만난 빌라 로보스는 직접적으로 클래식 피아니스트를 무시하는 말을 한다. 며칠 뒤 두 사람은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다. 빌라 로보스는 산책 중인 루빈스타인을 만나서 '진짜 브라질 음악'을 들려주겠다고 제안한다. 루빈스타인은 길거리에서 연주하는 쇼로를 듣게 된다. 이 만남은 나중에 루빈스타인이 파리에서 빌라 로보스를 알리는 계기가 된다.
입은 옷과 말투를 보고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문화를 이해한다는 건 인간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건 개인이나 민족이나 마찬가지다.
무엇이되었든 그 문화적인 뿌리는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서면 문화적 뿌리라는 건 인류 공통의 유산이기도 하다. 모두가 공감하는 감정이 있듯이 모두가 공감하는 음악이 있는 법이다. 독특한 형식이지만 그 감상을 전달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빌라 로보스의 음악은 인류 공동체라는 공허한 단어에 살아있는 의미를 느끼게 해주는 음악이다.
브라질풍의 바흐 제5번Bachianas brasileiras no.5은 8대의 첼로와 소프라노를 위한 음악이다.
이 독창적인 구성의 음악은 정확하게 지금의 남미를 느끼게 한다. 그건 포르투갈도, 독일도, 아마존도 아닌 우리가 알고 있는 남미의 소리다. 약간의 우울함과 뜨거운 열정이 만나서 춤을 추게 만드는 남미의 음악.
그의 음악은 아름답지만 아름답다고 말하기 어렵다.
슬프지만 슬프다고 말하기 어렵다.
흥겹지만 흥겹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의 음악은, 남미의 음악은 그 모든 것들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며 조금씩 움직인다.
너무 멀리 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제자리를 맴돌지도 않는다.
마치 흐르는 강을 멀리서 보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