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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람 Apr 16. 2016

사랑하고, 사랑을 지키고, 사랑을 숨기는 사람들의 노래

뮤지컬 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

| 음악이 만들어 낸 기시감


뮤지컬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은 내겐 특별한 기억을 남겨준 작품이다.


혁명은 시작되지 않았고, 팡틴Fantine을 제외하면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는데, 

1막이 끝날 때 나는 울고 있었다.


백성들의 노래가 들리는가? 화가 난 백성들의 노랫소리가?

그건, 이제 더 이상은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백성들의 노래다.

200년 전, 프랑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털끝 하나 관계없는 그 먼 곳의, 그 옛 일 때문에, 더구나 실제로 본 것도 아니고 단지 무대 위의 드라마를 보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 게 이상했다.


주변을 둘러봤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묘한 기시감旣視感.

여러 명이 동시에 너무나 사실적인 꿈을 관찰하고 있는 느낌.


내게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그런 작품이었다.

속도가 조절되는 회전무대가 공연 내내 돌아가고, 배우는 그 무대 위를 걸어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 배우는 제자리에서 걷고 배우의 속도에 맞춰 세트가 돌아 나온다. 


거대한 두 개의 로봇이 마치 영화 트랜스포머에 나오는 자동차들처럼 변신하며 장면을 바꾼다. 파리의 뒷골목이 순식간에 혁명군의 바리케이드로 변한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아이디어와 기술로 연출된 무대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진가는 음악에 있었다.

클로드 미셸 숀버그

클로드 미셸 숀버그Claude-Michel Schönberg는 프랑스 사람이다. 방송국에 근무하던 미셸 숀버그는 이 작품을 구상한 작사가 알랭 부브리Alain Boublil와 함께 뮤지컬을 만들고 공연한다. 그리고 프랑스어로 제작된 이 공연의 콘셉트 음반을 제작했다. 이 음반이 카메론 매킨토시Cameron Mackintosh 손에 들어간다.

당시 매킨토시는 이미 뮤지컬 캐츠Cats(1981)를 성공시켜 세계적인 제작자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매킨토시가 이 뮤지컬을 제작하기로 결정한 뒤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이 합류해서 작품이 전면 개작되고, 프랑스어 뮤지컬은 영어 버전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그리고 빅히트.


사랑하고, 사랑을 지키고, 또 사랑을 숨기는 사람들


공연 내내 끝없이 이어지는 음악이 관객들의 이성을 멈추게 하고 영혼이 깨어나도록 도와준다. 앞의 그 기시감으로 관객들은 현장에서 팡틴Fantine을 '다시' 만난다.


나는 내 삶을 꿈꿨었던 거야

이런 지옥 같은 곳과는 전혀 다른 삶을

지금 이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삶을

이제, 삶이 내가 꿨던 꿈을 죽이고 만 거야

영화 레미제라블, 팡틴 / 앤 해서웨이

엄마와 마찬가지로 현실과 완전히 반대편 모습의 꿈을 꾸는 소녀 코제트Cosette를 만난다.


구름 위에 성이 있어요.

거기선 아무도 소리 지르지 않아요.

흰옷을 입은 숙녀분이 날 안고 자장가를 불러줘요.

그리고 "코제트, 사랑해"라고 말해요.

영화 레미제라블, 어린 코제트

끝까지 자신의 '정의'를 따르다가 그 정의가 불의일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자베르Javert를 만난다.


어쩌면 그가 가장 불쌍한 사람Les Miserables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최소한 자신이 당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자베르는 자신의 '정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선'을 지키는 게 그에게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자베르 / 러셀 크로우

사랑을 원하고 꿈꾸지만, 숨기고 바라만보다가 그의 품에서 죽는 것으로 행복을 '경험'하는 에포닌Eponin을 만난다.


나 혼자 그 사람이 옆에 있는 척을 해

아침이 올 때까지 그 사람과 함께 걷고

그 사람이 없는데도 나를 감싸고 있는 그의 팔을 느껴

빗속에서 길은 은처럼 빛나고

어둠 속, 나무들은 별빛이 가득해

내게 보이는 건, 그 사람과 내가 영원히 함께 하는 거야 

에포닌 / 사만다 바크스

생존만이 삶의 유일한 목표였던, 그러나 최악의 세상에서 만난 도움의 손길로 인해 영혼이 깨어난 뒤 세상을 온몸으로 사랑하는 장발장Jean Valjean을 만난다. 


나는 누구지?

내 얼굴을 닮은, 내가 있어야 할 재판정에 가게 될, 죄 없는 사람.

그의 고통을 못 느끼는 척하며 그를 노예로 만들 것인가?


거짓말을 해야만 할까?

진정한 내 모습을 어떻게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내 영혼은 신에게 속해 있는데


그분은 내가 절망에 빠졌을 때 내게 희망을 주셨고, 삶을 계속할 힘을 주셨는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장발장

죄수 24601

장발장 / 휴 잭맨

사랑하고, 사랑을 지키고, 또 사랑을 숨기는 사람들. 아름다운 아리아들로 가득한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만들어내는 이 놀라운 인물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나를 그때 그곳으로 데려간다.


무대를 그리워할 만큼 아쉬운 스크린


하지만 영화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죄수들의 첫 장면.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이 잘려나간 바리케이드 장면에서의 보석 같은 합창곡. 평범한 목소리와 연기로 매력을 잃어버린 에포닌Eponine. 뮤지컬 무대에서 그토록 유쾌했던, 그래서 악역임에도 모두의 박수를 받았던 캐릭터였으나 원작의 장점을 완전히 제거한 나르디에 부부Thenardiers배역을 사양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만큼 지나치게 부족했던 러셀 크로우Russell Crowe 노래 등등 단점이 유난히 많이 보였던 건 역시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성인 코제트역의 아만다 사이프리드

이 작품의 중심엔, 이 작품을 빛나게 만든 음악이 자리한다.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에 존재하는 사람들, 무대 위에서 객석으로, 배우가 만들어 내는 소리의 파동이 관객 모두를 하나의 세계로 끌고 들어간다. 


현상으로 존재하지만 현실은 아닌 세계. 배우들에게는 관객을 그 세계로 데려갈 일종의 의무가 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만드는 환상의 세계 속에는 이야기가 있고 인물이 살고 있지만, 그 입구는 음악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음악은 이야기와 인물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그러고 보면 결국 영화 레미제라블이 주는 아쉬움은 가창력이 열쇠였는지도 모르겠다.


캐스팅의 문제였는지 감독의 연출력 때문이었는지, 혹은 제작진의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였는지, 어쩌면 이 모든 게 문제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캐스팅보다 아름다웠던 팡틴의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와 성인 코제트의 아만다 사이프리드Amanda Seyfried,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 빛이 났던 장발장의 휴 잭맨Hugh Jackman 등이 그 단점을 많이 가려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배우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던 뮤지컬 무대가 여전히 그립다.

https://youtu.be/ANyQEmhvs2I

30 Years of "One Day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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