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람 Feb 12. 2016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 슬픈 노래와 함께한 인생

[한국의 디바] ①

이미자(李美子, 1941년생. 19세에 공식 데뷔)는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2세에 아버지를 잃고,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어머니와 떨어져 외할머니댁에서 자란 그녀는 왜 노래를 불렀을까? 아니,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까?


어려운 상황을 잊을 수 있는 방편으로 노래를 불렀던 걸까? 아니면 노래하는 운명을 타고난 걸까?


사실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건 타고난 본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떤 문화인류학자는 인간이 노래를 하는 이유를 공작새 수컷의 꼬리 깃털이 화려한 것처럼, 일종의 성선택sexual selection , 性選擇이라고 주장한다.


사실이 무엇이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불렀고, 전 국민이 어려움을 겪던 1950년대에 직업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녀의 별명인 엘레지의 여왕슬픈 노래-비가悲歌의 여왕이라는 뜻이다. 1967년 발표한 박춘석의 곡 <엘리지의 여왕>이 히트하면서 얻은 별명이다. 그녀는 가요계 최정상에서 전설의 명예를 얻었지만 동시에 항상 비가悲歌와 함께 한 삶을 살았다.


데뷔 초기엔 기록적인 음반 판매로 세상을 얻었지만, 발표하는 곡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고 그 족쇄는 20년이 지난 1987년에야 풀리게 된다.

1964년에는 《동백아가씨》를 불러 국내 가요 사상 최초로 가요 프로그램에서 35주 동안 1위를 기록, 25만 장이란 엄청난 음반 판매고를 올리며 집과 전화 그리고 자동차를 장만할 만큼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위키백과


지금과 비교하면 미디어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던 당시에 25만 장의 음반 판매는 사실 설명하기조차 어려운 엄청난 성공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이혼과 대부분의 히트곡들이 금지곡이 된 현실 속에서 이미자는 가수 생활을 그만둘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첫 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딸과의 아픈 이별.

이미자의 딸 정재은은 엄마만큼이나 어려운 삶을 살게 된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정재은은 7살부터 악단에서 노래를 불렀다. 엄마의 유전자를 이어받아 가수로 인정받던 그녀는 엄마처럼 빠른 결혼과 빠른 이혼을 하게 되고, 아버지의 빚을 떠안으며 큰 시련을 겪는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엔카 가수로 활동을 한다. 어머니와 가족으로 살 기회조차 없었던 딸이 이미자의 인생에 또 하나의 비가로 남게 된 것이다.

이미자 - TV화면 캡쳐

2천 곡이 훨씬 넘는 곡을 취입한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 아마도 언젠가는 이미자를 뛰어넘는 가수나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트로트를 좋아하지 않는 젊은 세대까지도 그녀의 이름 속에서 전설을 발견하는 건, 시대와 실력을 떠나 존재 자체로 전설이 된 그녀에겐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슬픈 노래를 불러서 슬픈 인생을 사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자가 부른 수많은 노래는 전 국민을 함께 울렸고, 사람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슬픔을 녹여줬다. 그 대신 슬픈 운명의 길을 걸어간 그녀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눈물로 가득한 박수가 전부다.


부디 그녀의 삶이 운명을 극복하고 해피엔딩을 맞이하길 기원해본다.

https://youtu.be/b2k_AviV-c4

이미자 - 동백 아가씨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과 함께 변하는 세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