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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작가 Apr 13. 2020

아이에게 미움받을 용기

자신의 기준이 명확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미움 받을 용기를 내 봅니다.

“엄마! 목말라요 물주세요!”     


 급하게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다 말고 급하게 물을 뜨러 베란다로 나가다가 새끼발톱이 문틀에 걸렸다.    


 “아야!”     


 발톱이 들려 피가 났다. 순간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밥 하랴 아이 요구사항 들어주랴 허둥대며 정신없는 내 모습을 보니 마음이 울컥 했다. 괜찮은지 묻는 아이의 말을 들은 채 만 채 하고 밴드로 발톱을 칭칭 감았다.


 ‘나는 원래 이런 여자가 아니었는데, 이렇게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가 되어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애착육아' 였다. 어려서 부터 엄한 부모님 아래서 자란터라 내 아이에게 만큼은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애착육아는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고 요구사항을 잘 해결해 주는 것이고 그래야 아이가 자존감 있게 큰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의 말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귀를 기울이고 아이가 기다릴 틈이 없이 바로바로 해결해 주었다.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서로 교감을 주고받는 행복한 엄마의 모습을 꿈꿨는데 현실은 아이의 종이 되어버렸다. ‘아이의 요구사항’이 기준이 되어 엄마의 기준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엄마의 기준이 흔들리자 아이의 떼는 늘어만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던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하던 것을 멈추고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를 원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바로 들어주면 들어줄수록 아이는 기다리지 못했다. 자신이 얘기하면 바로 해결이 되어야 했고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신경질적으로 행동했다. 그렇게 헐레벌떡 아이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며 집안일을 하다 보니 발톱에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엄마가 되는 일이 그냥 힘든 거라고만 생각했지 ‘왜일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걸을 때 마다 욱신거리는 발톱을 느끼면서 계속 머릿속에 질문이 맴돌았다.


 “엄마! 나랑 놀아줘요! 나 심심해.”

 “엄마 지금 생각할게 있어. 연우 혼자 놀아.”


 예전 같았으면 ‘그래!’하고 같이 놀았을 텐데 이 날은 계속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아서 아이와 같이 놀 수가 없었다.


 “엄마 미워! 나랑 안 놀아주고!”     


 엄마가 밉다고 대답하는 아이의 말에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했다.


 ‘아! 나는 아이에게 미움 받기 싫어서 안 된다는 말을 못했구나!’     


 항상 친구들의 부탁을 잘 들어주는 아이였다. 누군가의 부탁을 거의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부탁하는 것을 거절했을 때 그 사람이 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사람 이었다. 바쁜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이 부탁하는 일을 해결해 주곤 했고 사람들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이 좋았고 더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사람들의 얘기에 귀 기울였다.

     

 이런 마음이 아이를 키울 때도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나는 사랑받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는 엄마가 되어 아이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을 때 우는 소리 떼쓰며 징징거리는 소리가 꼭 ‘엄마 미워’ 라고 들려서 ‘그래그래’ 하며 애착육아를 한다고 생각하며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러다 보니 엄마가 되는 것이 힘들었다. 엄마가 되는 일이 ‘왜 힘들까’ 질문을 시작하니 내 행동을 되돌아 보았다. 나의 모습을 한 발짝 떨어져서 관찰했다. 그러자 질문의 답이 될 만한 실마리가 보였고 그 실마리는 내가 아이와 생활하는 그 속에 흩뿌려져 있었다. 아이와의 대화, 함께 보낸 삶 속에서 모두 찾을 수 있었고 내가 하고 있던 엄마의 역할은 애착육아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아이가 참을성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막고 있었다.

 


“엄마! 나 시리얼 먹고 싶어요.”

 “엄마 지금 설거지 하고 있지? 이거 마무리하고 간식 줄게.”

 “안 돼! 지금! 지금 먹고 싶단 말이에요!”     


 아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자 다른 전략을 사용했다. 가장 마지막 패, 떼를 부렸고 짜증을 냈다. 짜증내는 아이의 목소리에 나쁜엄마가 된 것 같아 고무장갑을 벗고 ‘그래’라고 말할 뻔 했다.     


 “조금만 기다려 줘. ‘곰 세 마리’랑 ‘반짝반짝 작은 별’ 부르는 동안 엄마 설거지 다 할 거야. 같이 부를래?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 아빠 곰 엄마 곰 애기 곰.”

 “싫어! 싫어! 지금 지금!”     


 아이는 완강했다. 책을 보면 엄마가 어떤 조치를 취했을 때 금방 아이가 바뀌던데 우리 아이는 책 속의 아이가 아니었다. 예상했던 상황은 같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는데 아이는 계속 짜증을 냈다. 그래도 꿋꿋하게 노래를 끝까지 불렀다.      


 “이제 설거지 다 했으니까 빨리 시리얼 줘~”

 “연우야 이리 와봐. 엄마가 연우 꼭 안아주고 싶어.”     


 계속 짜증을 내는 아이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안아주는 일 이었다. 사람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으니 이런 습관이 생긴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려야 기다리는 힘을 기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몸에 무섭도록 베어버린 아이를 중심에 두었던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를 끊임없이 힘들게 했던 상황 속에서 질문을 던졌고 그 답은 이미 나의 삶 속에 있었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아이의 말 한마디에 흔들렸던 ‘나’라는 사람이 먼저 바뀌어야 함을 느꼈다. 아이에게 미움 받을 용기를 낼 때 엄마가 흔들리지 않는 육아의 기준을 잡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 기준이 엄마의 행동을 일관성 있게 하고 그랬을 때 아이도 자신의 말만 들어달라고 '떼쓰는' 일을 그만둘 수 있게 됨을 알게 되었다.


 용기를 내지 못했던 시간만큼 아이가 변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시작이 반' 이라고 했다.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몰랐을 나의 모습을 이렇게 발견했고 아이가 변하기를 바라기 전에 엄마인 나의 모습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엄마도 아이와 함께 성장해 나갔다. 아이가 다른 사랑받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되기보다 자신의 기준이 명확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아이에게 미움 받을 용기를 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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