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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작가 Apr 08. 2020

커피 한잔의 유혹

미지근한 커피를 주유합니다.

"자전거 타고 운동하다가 나현쌤 동네 근처에 왔는데 혹시, 커피 한잔 할래요?"

"네????"


한참 벚꽃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요즘 같은 날이었다. 봄바람에 마음이 살랑이는데 자전거를 타다가 근처에 왔다며 '지금의 남편'이 나를 불러냈다. 처음에는 선배라서 당시 초임이라 힘들었던 나를 위로해 주는 남편이 고마웠다. 지금까지도 그날처럼 밤에 커피를 그렇게 많이 마셔본 적이 없다.


 



"한잔 더 내려드릴까요?"

"아, 아! 고맙습니다."


남편과 썸을 타던 시절 커피숍에서 만난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곱 살 차이 나는 남자는 나에게 '어른'처럼 느껴졌고 내 시시콜콜한 고민을 차분히 들어주는 멋진 사람이었다. 드립 커피 한 잔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왜 그리도 입술이 마르던지 눈 앞에 커피를 계속 홀짝였다. 잔이 빈 것을 알고 친절한 카페 사장님은 계속 드립 커피를 리필해 주셨다. 어디에서도 그렇게 친절하게 빈 잔을 보며 커피를 채워준다고 했던 곳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날 사장님이 신기하리만치 커피를 계속 리필해 주셨다. 목마를 때 바닷물 마신 것처럼, 커피를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났고 입술이 말랐다. 잔이 비면 재깍재깍 채워주신 사장님 덕분에 한 시간 동안 세 잔을 연달아 마셨다. (나중에 다시 가 보니 같은 사장님 이셨는데 그렇게 리필을 해주지는 않으시던데...., 흠흠, 그날 남편과 사장님의 어떤 딜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ㅋㅋ)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나현쌤도 잘 자요."


'잘 자요'라는 말이 무색했다. 나는 그날 카페인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밤새도록 분명 눈은 감고 있는데 정신은 멀쩡한 느낌, 자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자는 것은 아닌 그런 상태로 밤을 꼴딱 지새웠다. 심지어 커피 세 잔은 심장까지 무지막지하게 두근대게 만들었다. 묘한 두근거림은 내가 그 남자를(지금의 남편) 만나서 설레는 건가? '착각' 아닌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날 밤은 잠들지 못하고 두근거리며 지새웠다. 그 이후 벚꽃나무 아래에서 배드민턴 치자고 꼬시는 남편과 연인이 되었다. 좋은 인연이 된 데에는 그날 사장님의 커피가 한몫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선생님, 제가 밀크티를 자기 전에 마셨는데 잠이 안 오더라고요."

"밀크티도 홍자가 들어가서 카페인 함량이 높아요. 카페인에 약하면 그런 고 카페인은 자궁이 수축될 수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유난히 카페인이 약한 체질이었던 나는 임신을 하면서 그 좋아하는 밀크티도 자주 마시지 못할 만큼 카페인에 취약해졌다. 결국 임신과 모유수유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커피를 끊었다. 디카페인이나 대체품도 마셔봤는데 그렇게까지 커피를 마실만큼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그냥 마시지 않다 보니 마시지 않게 되었다.


'아, 오늘은 커피 한잔 마셔야 될 것 같아.'


그런 나도 아침부터 커피를 찾는 날이 있다. 아이 둘을 가정보육하면서 육아 퇴근 후에 시간을 즐기다 보면 시계가 새벽을 가리키는 것도 모르고 신나게 자유를 즐긴 다음 날, 분명 피곤한 몸 상태로는 아이들 작은 행동에도 짜증을 낼 것이 뻔하므로 아침부터 미리 예방차원에서 나를 'up' 시켜줄 커피를 한잔 마신다. 커피 봉지를 뜯으면 콧 속으로 훅 들어오는 커피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커피 향을 맡을 때마다 그날의 사장님이 떠오른다. '그 카페는 아직 잘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카페에 안 간지도 엄청 오래되었네.'


"내 거야!!!"

"싫어!!! 내 거야!!!"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을 느끼며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려던 계획은 무산됐다. 아침부터 파이팅 넘치게 전투를 시작한 아이들을 향해 돌진하기 전, 아직 다 끓지 않은 물을 급히 부어 미적지근한 커피를 탕약 마시듯이 원샷하고 든 몸을 가볍게 푼다. '오늘도 아자자 잣!'  "얘들아! 엄마 간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자, 이제 자야지."

"꺄햐햐햐햐햐햐, 은수야 이리 와봐, 우리 옷 벗을까?"

"꺄햐햐햐햐햐햐햐햣"


사회적 거리두기의 영향으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요즘, 아이들의 에너지가 밤늦도록 사그라들 줄을 모른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아이들은 속옷과 기저귀만 놔둔 채 옷을 홀딱 벗고는 침대 위를 방방 뛰어다니며 흥을 주체하지 못했다. 저녁 무렵 커피로 주유한 에너지가 바닥을 치는 시간에는 아이들의 에너지가 감당하기 벅차다.


"자, 이제 잘까? 이제 불 끌까?"

"싫어!! 아직 안 졸려요. 안 잘래. 더워서 팬티도 벗을 거야."

"꺄햐햐햐햐햣"

"안돼! 은수 기저귀 차야지. 오줌 나오면 어떻게 해! 연우도 얼른 옷 입어! 얼른!!! 이리 와, 이리 와!"

"도망가자!!! 꺄햐햐햐햐"


오빠를 따라 동생도 기저귀를 풀어재낀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이 예뻐 보여야 정상인데 한데 쥐어박고 싶어 진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이들의 엉덩이를 향해 손이 올라가려는 충동을 막을 수가 없었다. 손을 올렸다가 '아니야, ' 하고 손을 내렸다가도 잡히지 않는 아이들의 엉덩이를 향해 자꾸만 손이 나가려고 했다.  


"엉엉엉어엉엉엉, 엉엉 엉엉엉"

"엄마가 그러니까, 이제 자자고 그랬지! 왜 그렇게 엄마 말을 안 들어! 어? 침대 위에서 뛰어다니지 말라고 그랬지! 뛰어다니니까 부딪히지! 어?! 얼른 이리 와. 팬티랑 기저귀랑 옷이랑 다 입어! 얼른!!"

"그러니까, 어? 조심해야지 은수야! 어?"


'맙소사,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투다!' 첫째가 동생에게 훈계하는듯한 말투가 꼭 누군가를 닮았다. 어쩜 이렇게 아이들은 엄마를 닮아가는지, 비슷한 모습이 보일 때면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내가 진짜 저렇게 말하나?'


"자, 둘 다 이리 와 봐. 엄마가, 이리 와서 이제 옷 입고 이제 자자고 말하면 '네' 해야지. 지금 밖에 깜깜하잖아."

"나는 은수가 웃는 게 좋단 말이야."


'아!'


둘이 가만히 장난치는 모습을 볼 때면 서로 마주 보고 장난을 치는데, 꼭 첫째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면 둘째 아이는 그걸 보고 깔깔 웃는 식이다. 그렇게 웃다가 둘째가 첫째 하는 행동을 따라 하면서 일이 벌어진다. 오빠의 웃긴 행동을 따라 하자니 몸이 안 따라주는 것이다. 행동이 야무지지 못한 둘째는 결국 어딘가 부딪히거나 다친다. 둘째가 또래보다 유난히 신체발달이 빠른데 오빠를 따라 하고 다치며 알게 모르게 많이 배우고 있었나 보다. 엄마는 매번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그 모습을 보았으니 첫째가 둘째를 못살게 굴었다고만 생각했다.


"연우는 은수가 웃는 게 좋아서 계속 웃겨주려고 방방 뛰었구나? 그래도 지금은 깜깜한 밤이니까 자야 되는 시간이야. 우리 이제 옷 입고 잘까?"

"네"


어쩐 일인지 아이들이 순순하게 옷을 입었다.


"까르르까르르"

"딩굴딩굴"

다 같이 누워 조용히 자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2차전이 시작됐다. 웃는 소리가 조금은 귀엽게 들렸다.


 에라 모르겠다 졸리면 자겠지.
하암! 그냥 나나 자자!


새벽에 일어나 잠든 아이들을 보면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곤히 자고 있다. 아이들보다 내가 먼저 잠들었는지, 같이 잠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자다 말고 피식 웃는 아이의 잠꼬대를 보니 같이 웃음이 난다. 어쩜 자는 자세도 둘이 똑같다.



무엇이든 같이 하려는 아이들
그렇게 서로를 보고 배운다.
그렇게 나도 아이들을 보고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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