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하고 훌륭한 일이 아닐지라도

나의 일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by NAIN


3년 차. 딱 일에 대해 고민하기 좋은 시기이다. 오죽하면 직장인 권태기 3, 6, 9의 법칙도 있을까. 동기부여를 받아야 일을 잘하고 싶어지는 성향이기 때문에, 늘 일의 WHY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매번 WHY를 떠올리며 일하기란 쉽지 않다. 처음 내게도 분명 뚜렷한 목표 의식이 있었으나, 매일매일의 해야 할 일이 더 중요해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주말만 기다리는 아주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요즘 <유 퀴즈>를 보다 보면 정말 사회적으로 좋은 의의를 가지고 있는 직업들도 많다. 퇴사를 하고 프리랜서나 자영업 일을 하며 자기 다운 일을 찾아가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에 비하면 나는 회사에 돈을 벌어주기 위해 일하는 존재같이 느껴졌다. 매출 부서에 있어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얼마 전 우연히 <펜트하우스> 김순옥 작가님의 인터뷰 글을 봤다.


"저는 드라마 작가로서 대단한 가치를 전달하고 싶다거나 온 국민을 눈물바다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요. 제가 그냥 바라는 건 그냥 오늘 죽고 싶을 만큼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들, 자식들에게 전화 한 통 안 오는 외로운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런 분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거예요. 제 드라마를 기다리는 것, 그 자체가 그분들에게 삶의 낙이 된다면 제겐 더 없는 보람이죠. 위대하고 훌륭한 작품을 쓰는 분들은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꽤나 충격적이었다. <펜트하우스>를 시즌 1부터 재미있게 보고 있으면서도, 막장이라는 편견을 놓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의 가치관이 담긴 인터뷰를 보고, 이 편협한 사고방식이 부끄러워졌다. 그렇다. 꼭 모든 드라마가 대단한 가치나, 대단한 감정을 담아낼 필요는 없다. 모든 이야기에는 저마다의 쓸모가 있고, 또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줄 것이다. 막장이든 정극이든, 어떤 시청자와 작가에게는 드라마라는 매개체를 통해 가감 없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분출해내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일 것이다.


다시금 생각해보면, 나도 사회적으로 엄청난 의의가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꼭 위대하고 훌륭한 일이 아닐지라도, 누군가에겐 충분히 쓸모가 있는 일일 것이다. 처음 입사했을 때 연차가 있으신 분께 들은 말이 기억난다. 이 일을 하다 보면 뿌듯한 순간이 꽤 온다고 하셨다. 유아동 제품 관련 일을 하다 보니, 길 가다가 귀여운 꼬맹이가 우리 제품을 들고 있을 때면 기분이 정말 좋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아이를 보면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가고 괜히 말 한마디 걸고 싶어 졌다. 직접 계약하고 기획한 제품이 어떤 아이의 손에 들려 하나의 행복과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건 참 진귀한 경험이다.


내게도 어렸을 적 가지고 놀던 완구나 애지중지하던 물건들이 대한 추억이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있다. 복막염 수술했을 때 외삼촌이 사다준 곰인형, 동생과 가지고 놀던 미키마우스 주방놀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바비인형 등. 이미 내 손을 떠난 지 오래지만 늘 기억하고 있다.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늘 곁에 있었기에 기억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아이들에게도 우리의 제품이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매번 떠올리고 살진 않지만, 늘 가슴 한편에 남아있는 그런 존재. 또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첫 경험이 될만한 것을 만들고 있었다. 어떤 아이에겐 생일날 받은 첫 선물이 될 것이고, 어떤 아이에겐 가족 나들이의 첫 추억이 될 것이다. 어떤 부모에겐 아이와의 매개체가 되어줄 수도 있다. 이밖에도 지금은 알 수 없는 또 다른 소소한 의미들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정직하게 일해 정직하게 번 돈이다. 그 노동의 결과물로서 나와 주변 사람들을 위한 소비를 하고, 일부는 미래를 위해 저축과 투자를 한다. 책 <언스크립티드>에 의하면 각본화 된 삶에 불과하겠지만, 건강한 몸으로 일을 지속할 수 있고 그에 합당한 노 등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어찌 됐건 참 행복한 일이다.


내 일을 둘러싼 여러 의미들을 곱씹어 볼 수 있었던 좋은 인터뷰였다.

이전 05화평가하고, 평가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