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in나 essay 24
좋은 게 좋은 거야(1)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구독자님들, 궁금한 뒷 이야기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명 새 이불을 구매했는데......' 새하얀 이불에 다양한 길이의 검고 가느다란 물체들이 붙어있었다. 노란빛을 띤 정체 모를 이물질도 여러 개였다. 누군가의 집에 고착된 그들만의 냄새가 배어 있었고,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른 하자가 있는지 살피기도 싫었다. 역한 냄새와 이물질을 제거한다면 사용은 가능하겠지만 찜찜했다. 이물질이야 제거하면 된다지만 역한 냄새는 어쩔 텐가. 세탁세제나 유연제의 향기로 덮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교환하러 가야 하나?!' 순간 짜증이 올라왔다. 새 상품 구매를 하고 이런 황당한 일을 겪다니... 다시 먼 거리를 오가야 하는 시간적 손해가 짜증을 더 부풀렸다.
불편한 기분을 달랠 때 시도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최대한 나를 달래서 편안해질 수 있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이불의 이동 경로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환불한 고객은 양심 불량일 거야. 환불 가능한 날까지 좋다고 사용했겠지!' 상상은 몇 초만에 빠르게 이뤄졌다. '고객 센터에서는 구매 기간과 영수증만 확인하고, 이불을 꺼내 보지 않았겠지' 고객 센터 직원의 업무 과실을 탓하기 시작했다. '겉보기에 잘 개어져 있었으니 의심하지 않았겠지' 어쩌면 나도 마찬가지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인다고 했던가. 세상은 제눈의 안경인 셈이니까. 이불을 사용하다가 환불하러 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거라고, 환불 고객이 양심 불량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을 거라고 고객 센터 직원 편이 되었다. '예상대로 환불되자 빠른 걸음으로 유유히 달아났겠지', '환불 가능한 기간 동안 마음껏 사용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당당한 미소를 지었겠지?' 계속해서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울 것 같더니 내 상상은 여기까지였다. '혹시라도 사용한 것이 들킬까 봐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달랬겠지',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했을까? 부끄럽진 않았을까?', '상상도 못 할 일이니 이 사실을 알면 직원들도 난처하겠지?'
교환받는 내 입장을 내세우자고 고객 센터 직원 탓을 하기는 싫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그저 뽑기를 잘못한 '내 운'을 탓하기로 했다. 지금껏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언젠가 겪을 수도 있는 일을 경험한 것이라고 털어버리자고 말이다. 상상이 만들어 낸 나쁜 고객에 대한 생각도 떨쳐버리기로 했다. 이불 상태를 확인시키고 교환 요청을 하기로 했다.
뭔지 모를 향과 섞인 체취에 집안 냄새까지 배어 역한 냄새가 나는 그 이불은 정말이지 손가락 하나 대기 싫었다. 냄새가 강해서 비닐 가방에 담지 않으면 도무지 가지고 갈 자신이 없었다. 숨을 멈추고 대충 접어 담고 지퍼를 닫았다. '정말 별 사람이 다 있네. 사람이 다 내 맘 같지 않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그나저나 사 둔지 좀 되었는데... 교환 기간이 언제더라?' 이제야 아차 싶었다. 구매한 날짜가 기억나지 않았다. 교환 기간이 지났을까 봐 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영수증철을 뒤지며 급하게 찾았지만 없었다. 이럴 수가! '영수증이 없다. 어떡하지?' 손은 재빠르게 결제 문자를 검색했다. 다행이었다. 한 달이 넘었을까 봐 불안했는데 2주가 채 안 되었다. 영수증은 없지만 결제 이력이 있으니 일단 교환하러 가기로 했다. 새 이불이 세탁되는 동안 다른 할 일도 있었는데... 그 일들을 미뤄야 했다. 다시 짜증이 올라왔다. 계획 없던 외출이 번거롭게 느껴졌다.
다행히 환상적인 날씨가 짜증을 잊게 했다. 그림책의 한 면을 보는 듯 파란 하늘에는 뭉게뭉게 흰구름이 가득 차 있었다. 불편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언제나 그랬듯 사진을 찍었다. 하늘과 구름을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는 아름답다며 물었다. "어디 가는 길이야?" "응, 마트에." " 조심히 다녀와." "고마워!" 하늘과 구름, 친구 덕에 덤덤해졌다.
고객 센터로 향했다. 방문객은 없었다. 한가한 시간인 거 같아 다행이었다. 고객 센터 직원들은 음료를 마시고 이야기하며 웃고 있었다. '저 표정을 변화시킬 이불이 왔을 줄 저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번호표를 뽑았다. 오른손에 들린 이불의 무게가 배로 느껴졌다. 띵동! "263번 고객님!" 고객 센터 직원 1의 호출에 앞으로 갔다. 고객 센터 직원 1은 빠른 시선 처리로 내 손에 들린 물건을 확인하는 눈치였다. 이불이 대충 담긴 것을 보고 불만 고객이 틀림없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미소 띤 표정으로 물었다. "구매 영수증을 분실했어요. 구매 이력 확인해 주시고, 상품 확인 해 주세요." 영수증 재발급 후 상품 확인이 시작됐다. "어떻게 이 상품이 새 상품이죠? 전 분명 새 상품을 샀는데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직원 1은 이불을 꺼냈다. "이 냄새가 새 상품 냄새일 수 있나요?" 직원 1은 냄새를 맡고 표정이 굳었다. 나는 직원 1이 들고 있던 이불을 펼쳐 보였다. "여기 보이시죠? 저기도. 이것도. 이거 새 상품이 아닌 거죠?" 옆 창구에 있던 직원 2가 내 불만을 듣고 다가왔다. "어떻게 이런 상품이 판매되나요?" 당황한 얼굴로 직원 2가 말했다. "새 이불이 아니네요." 고객 센터 뒤 직원 사무실에서 남자 직원이 나왔다. 이불을 건네받고 상태를 확인했다. 눈빛을 전달받은 직원 1은 말했다. "결제 카드 주시겠어요? 환불처리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저는 동일한 새 상품으로 교환받고 싶어요." "아, 그러면 상품 재고 확인 후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직원 1은 말했다. "혹시 다른 상품 쇼핑은 안 하시나요? 쇼핑 먼저 다녀오시면 상품 확인하고 준비해 두겠습니다." "아... 네..." 구매할 상품은 없었지만 잠시 고객 센터를 벗어나기로 했다. "이제 상품 준비 됐겠지?" 다시 고객 센터로 향했다. 직원 1은 다가가는 나를 보자마자 "고객님, 상품 확인하고 가져가시겠어요?" 하며 이불을 꺼내어 새 상품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혹시나 하고 나는 코를 내밀었다. 새 이불은 역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이불을 가지런히 담은 직원 1은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들은 초기 대응에서 죄송하다 불편했겠다는 둥의 공감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이 나의 불쾌함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고, 내가 다른 구차한 이유를 덧붙이지 않고 언성을 높일 필요 없이 교환 절차가 빠르게 진행됐다. 짜증스러운 마음을 간신히 달래어 덤덤했던 내 마음에 다시 불만이 솟구치지 않았던 이유이다. "네, 감사해요. 수고하세요." 직원 1의 눈을 보며 가벼운 눈미소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마트 일은 잘 봤어? 집이야?"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응, 집에 가는 길이야." 친구에게 오늘 일을 이야기했다. "헉. 무슨 일이래. 와! 고생했네. 진짜 싫었겠다." 친구의 위로와 공감을 들으니 웃음만 나왔다. "근데, 교환만 했어?" "응." "아이고, 모지리~ 상품 하자로 시간 내서 왔다 갔다 했는데 그냥 상품만 교환했다고?" "응." "그래, 너답다!" 하려던 말을 참는 걸 알았다. 친구와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정말 내가 모지리인가 잠시 고민했다.
나는 오래전 한 기업의 본사 고객 센터에서 근무했었다. 별별 유형의 고객들을 응대했다. 얼토당토않은 보상을 요구하는 고객도 많았다. 불만 고객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이 손에 쥐어야 불평을 잠재우는 사례가 대부분이었다. 친구가 나에게 모지리라고 말한 것은 작은 보상조차 받지 않은 것을 나무라려다 삼킨 것이었음을 알고 있다. 불편하게 오갔어야 하는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보상받아야 마땅했을까. 그 어떤 보상을 요구하지 않은 나를 고객 센터 직원은 호구라고 생각했을까. 친구도 농담 반 진담 반이었겠지.
모두가 마음 편했으니 됐다. 내가 사용할 물건을 제대로 교환받았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비록 해야 하는 일을 못했고 예상하지 못한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했지만 오가는 길에 내가 좋아라 하는 푸른 하늘과 구름을 만났다. 교환하러 나서지 않았다면 집콕했을 것이다. 덕분에 따뜻한 햇살과 바람맞으며 화창한 날씨를 누렸다. 불쾌함을 잊을 만큼 오가는 길은 좋았다. 그걸로 됐다. 계산상 보상을 받지 않아 내가 손해 본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늘 어떤 부분에서든 득과 실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진리 아니던가. 오늘 잃은 것이 있다면 언젠가 더 얻게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기분 좋은 마음을 유지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떤 이유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헤집고 불편하게 만들어 언젠가 후회할지 모르는 일은 만들지 말자고 노력하며 사는 것은 참 괜찮은 삶이라고 다시 한번 느끼게 된 하루다.
언젠가 '그때 그랬었지' 하고 회상하며 웃을 수 있는 사건이 있는 것도 나름 괜찮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