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로 모솔특집편을 보다가 든 생각
“어제 본 귀여운 남자애 얘기를 잔뜩 들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이미 알고 있어. 난 걔를 좋아하지 않아” -오지은, <익숙한 새벽 3시>
좀 부끄럽지만… 이라고 시작하려다 보니 이때까지 모든 연프 관련 글을 쓸 때 좀 부끄럽지만…을 넣고 썼다는 걸 깨달았다. 좀 부끄러운 거치고 너무 많이 이야기하고 다니긴 하지만 여전히 얘기할 때마다 조금 부끄러운 건 사실이다. 특히 <나는 솔로>를 아직도 보고 있다는 것은 조금 많이 부끄럽다. 작년부터 주변인들에게 한 하차 선언만 한 열 번은 되는 것 같은데, 사실 아직 하차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 볼 때마다 치를 떨면서… 남몰래 수치를 즐기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부끄럽다. 이 자리를 빌려 엄중히 이야기하는데, 이제 수치는 더 이상 못참겠고, 이번 모솔 특집만 마치면 정말로 하차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이 글 한 편 먼저 써보고요.
이번 나는 솔로 모솔 특집을 한 줄로 요약하면, 위 오지은의 노래 가사와 같다. 일단 이해를 위해 몇몇 등장인물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하겠다. 아니 대체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찾은 건지 (제 발로 걸어왔다고 합니다) 아주 개성이 넘친다. 하지만 넘치는 개성들 사이 묘하고 강력한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당연히 모솔특집 이니까, 모솔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여자 출연자들은 다 괜찮아 보인다. 남자 출연자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주눅이 너무 들어있거나, 주눅 좀 들어야 할 것 같은데도 쓸데없이 당당하거나.
일단 여성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면 창밖을 보며 주르르 눈물을 흘리는 비련의 남주 재질 광수가 있다. 그는 이 프로그램 시작부터 주눅이 너무 들어있는데, 여기서 그에게 몇 번이나 눈물을 선사한 우리의 힐러 영숙이 등장한다. 영숙은 인상부터 굉장히 똑똑하고 다부져 보이고, 이미 남자들의 등장과 동시에 짝 찾기를 포기한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영숙은 따뜻한 말이 고픈 남성들 사이에서 꽤 인기가 많은 편이라, 어쩔 수 없이 돌아가며 데이트를 하게 된다. 남성들의 고충과 살아온 인생의 이야기를 웃는 표정으로 들어주고, 적절한 위로를 해주며, 그러면서도 아주 단호하게 선을 그어 로맨스로 발전될 여지를 완벽히 저지하는 그 모습은 너무나 유려하고 자연스럽다. 뭔가… 자발적 솔로를 원한다면 배워야 할 100점짜리 스킬셋이랄까? 그녀가 스쳐 간 자리에는 감동과 눈물이 남고, 한 남성 출연자는 ‘가랑이 사이에서 길 수도 있다’는 표현을 몇 번이나 써가며 그녀를 찬양하지만 우리는 모두 결과를 알고 있다.
광수가 자아성찰을 하는 시간을 보내는 사이, 나머지 남자들은 그래도 구애를 시작한다. 영수는 웹툰 작가 영자에게 적극적 구애를 한다. 영자는 계속 애매한 태도를 보이지만 그래도 항상 떨떠름한 표정으로 데이트는 나간다. 영호는 현숙에게 구애 중이다. 현숙 또한 애매한 표정과 애매한 태도로 데이트에는 응하고 있다. 영수와 영호는 앞에 말한 두 부 류중 후자다. ‘구애 중인 나’를 너무나 신경쓰느라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들이 데이트를 나갈 때마다 희한한 대화와 태도들이 화제가 되긴 하지만, 그 전에 근본적으로 아주 큰 문제가 있다. 이 사람들은 서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글러브를 끼고 링에 들어왔으니, 누구라도 때려야겠다는 마음인 걸까? 남자들의 행동에는 ‘연애란… 이런 건가?’ ‘매너란… 이런 건가?’ ‘좋아하는 여자에겐… 이렇게 해야 하나?’라는 질문과 역할 수행만 보인다.
둘 중 더 심란한 건 영호다. 그는 처음부터 아주 무서울 정도로 또박또박하게 “손을.. 잡아볼까요?”라든가 “놀이공원에 같이 갈 수 있지 않을까요?”라든가 “목걸이를 선물로 주고 싶어요”라는 연애의 클리쉐를 상대방에게 들이댄다. 하지만 현숙은 똑똑한 사람이다. 처음 몇 번은 ‘이게 썸이란 건가’ 라는 마음으로 맞춰가는 듯 보이다가, 본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게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게 된다. 몇 번이나 거절을 하지만 이미 아무것도 보이고 들리지 않는 영호는 계속 무섭게 드라마에서 나오는 연애의 장면들을 읊어댄다. 급기야 최신화에서 현숙은 구애봇 영호에게 “내가 당신에게 보여주는 태도는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인데, 당신이 이성적인 포인트를 느끼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응한다. 영호는 숙소에 돌아와 다른 출연자들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어떤 느낌이에요?”라고 묻는다. 최종 선택 하루 전날 벌어진 일이다.
그래도 여성 출연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잘 들으려고 노력한다. 처음에는 역할극에 좀 맞춰주는 듯하다가 이내 본인의 마음을 알게 된다. ‘난 걔를 좋아하지 않아.’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남성 출연자들은, 본인 마음의 소리도 듣지 않는다. 이번 모솔특집 남성 출연자들의 공통점은, 감정에 언어를 붙이는 일에 서툴다는 것이다. 어떤 마음이 들어도, 그것이 단순한 감상인지, 끌림인지, 끌림은 어떤 식인 건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어디서 많이 들어본 쉬운 말로 치환해버 린다. 그런 인터뷰 장면들을 볼 때 마다 깊은 탄식과 함께 생각한다. 스스로를 착각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마음을 언어로 옮기는 일은 모두에게 어렵다. 남에게 내 이야기를 할 때나, 어떠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쓸 때, 떠오르는 마음을 글이나 말로 정리하다 보면 의외의 결론에 놀랄 때가 있다. 내 마음은 이게 아니었는데 사실은 이랬던 거야? 그게 마음의 결론이든 언어의 결론이든 일단 결론이 나면 마음은 그것을 따라간다.
언어란 참 신기하다. 똑같이 화나고 갑갑한 마음에서 출발해도, 감정의 결을 잘 옮기다 보면 어떤 갑갑함은 미움이 되고 어떤 갑갑함은 사랑이 된다. 충분하다는 마음은 오히려 미지근한 결론이 되고 오히려 충분하지 않은 마음이 뜨거움으로 떨어진다든가. 언어를 따라가다 보면 몰랐던 마음을 발견한다. 그 순간은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뭐든 인과관계를 잘 따져 깔끔하게 정리하는 걸 편안해하지만, 가끔 어떤 마음은 언어로 정리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게 되어 버릴까 봐 그냥 뭉쳐놓고는 한다.
당연히 사고를 한국어로 하고 언어도 한국어를 사용하지만, 마음에 언어를 백 퍼센트 정확하게 붙일 수 있을까? 뭉쳐진 마음을 정돈된 언어로 곧게 펼 수 있을까? 곧게 펴진 글과 말이 진짜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마음을 듣는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 마음을 언어화한 상태에서 생각한다는 건데 그럼 스스로를 정확하게 아는 건 평생 불가능 한 일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다 문득 나도 모르게 모솔특집 남성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두들겨 맞은 듯 정신을 차렸다. 어이쿠 하마터면 공감할 뻔했네…
스스로를 집요하게 들여다보고 이해하려면 품이 많이 든다. 자신의 마음에 남의 언어를 붙여 착각하고 넘어가는 것은 쉬운 길이다. 항상 어려운 쪽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니지만, 가야 할 때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싶다. 꾸미지 않은 언어로, 마음을 과장하지도 무시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따라가보기. 평생에 거쳐 연습해야 할, 마음에 언어를 붙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