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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릇하고 짓궂은 작가 연대기
쓰라면 쓰겠어요
1.-1.날카로운 첫 영화의 추억
by
얼굴씨
Jul 12. 2023
쓰겠어요
너는 봉투를 쓰고 나는 글을쓰고
대학 3학년, 문창과보다 영화과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던 같은 과 선배가 불쑥 제안을 했다.
알바 하나 할래?
툴툴대는 시외버스를 타고 왕복 거리만 3시간.
과외를 마치고 늦은 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은 늘 빠듯했다.
게다가 틈나는 대로 삼겹살집 솥뚜껑 닦기, 매장 서빙, 전단지 돌리기 등
젊은 나는 늘 막중한 아르바이트에 허덕이고 있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되게 가난해져 있었는데,
찬밥처럼 방에 담겨 있었다던 더 궁핍한 문학도들은 나를 겸허히 노동하게 만들었다.
불행배틀이라도 하듯, 우리는 저마다 행복하지만은 않았어서 서로 기대어 참 살 만했다.
주머니에 들어오는 정직한 일급 혹은 주급들은 날 설레게도 했다.
남은 돈으로 소주 말고 맥주도 사 먹고,
휴가 나온 친구의 군복에 만 원짜리 몇 장을 몰래 넣어주기도 했다.
낭만적 한탕주의자였던 그 시절.
내 가난한 청춘의 첫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돈벌이용 글쓰기는 처음이었다. 두근거렸다.
아니 이렇게 일찍 작가가 돼도 되는 것인가.
3일 후 면접, 이 주제로 시나리오 한편 써 오래.
문창과에 지원하기 전, 영화과 특차 면접에서 똑 떨어진 시네마키즈였던 나였다.
하지만 시나리오 원고를 제대로 본 적도, 써 본 적도 없는 나는!
썼 다.
솥뚜껑을 깨끗이 닦으라고 하면 그냥 열심히 박박 닦았던 것처럼,
그냥 썼다.
면접 장소가 홍대역 바로 앞 유명 개그맨 사무실이라고 하니,
그런 힙한 곳을 구경하러 가는 설렘도 있었겠지. 아무튼 나는 열심히 썼다.
정확히 기억한다.
크리스마스이브,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보낸, 그다음 날이 작품을 들고 가서 면접을 보는 날이었다.
하필 그 해 크리스마스엔 눈이 그렇게 많이 왔다. 이뻤다.
창으로 내리는 눈이 어찌나 밝던지 낮밤을 잠시 잊었던 것도 같다.
그냥 하라는 대로 시나리오를 쓴 건데, 쓰다 보니 이틀을 꼬박 새웠고 A80 여 장을 끝내버렸다.
이런저런 시나리오 용어 거의 없이 마치 소설 쓰듯 빡빡하게,
그렇게 러닝타임 2시간짜리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다 못 썼는데요.
선배는 시놉 한 장을 겉면에 붙인, 한 열 장쯤 되는 너덜거리는 대본을 구겨 들고는 짝다리를 한 채
반항하는 사춘기 녀석처럼 건성으로 대답을 했다.
야, 넌 가. 그리고 다음 너, 그래 너. 이제 우리 작가팀에 들어온 거야. 열심히 잘 써 봐. 수고했어.
선배는 잘리고 나는 붙었다.
젠장, 넌 이걸 왜 다 썼냐.
선배는 의문인지 감탄인지 모를 그 담백한 문장을 남기고 쿨하게 사무실을 나갔다.
죄송하게도 그걸 다 써 버린 나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원고매수로 막내 작가 아르바이트를 거머쥐게 되었다.
선배는 그 이후로도 한참을 영화판에 있었다고 들었다.
그녀만의 시그니처 말보로 레드를 딱 입에 물고, 마치 현장의 영화인처럼 혹은 서부의 사나이처럼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그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다음편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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