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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라면 쓰겠어요

1.-1.날카로운 첫 영화의 추억

by 얼굴씨
쓰겠어요

너는 봉투를 쓰고 나는 글을쓰고




대학 3학년, 문창과보다 영화과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던 같은 과 선배가 불쑥 제안을 했다.


알바 하나 할래?


툴툴대는 시외버스를 타고 왕복 거리만 3시간.

과외를 마치고 늦은 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은 늘 빠듯했다.

게다가 틈나는 대로 삼겹살집 솥뚜껑 닦기, 매장 서빙, 전단지 돌리기 등

젊은 나는 늘 막중한 아르바이트에 허덕이고 있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되게 가난해져 있었는데,

찬밥처럼 방에 담겨 있었다던 더 궁핍한 문학도들은 나를 겸허히 노동하게 만들었다.

불행배틀이라도 하듯, 우리는 저마다 행복하지만은 않았어서 서로 기대어 참 살 만했다.

주머니에 들어오는 정직한 일급 혹은 주급들은 날 설레게도 했다.

남은 돈으로 소주 말고 맥주도 사 먹고,

휴가 나온 친구의 군복에 만 원짜리 몇 장을 몰래 넣어주기도 했다.

낭만적 한탕주의자였던 그 시절.

내 가난한 청춘의 첫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돈벌이용 글쓰기는 처음이었다. 두근거렸다.

아니 이렇게 일찍 작가가 돼도 되는 것인가.


3일 후 면접, 이 주제로 시나리오 한편 써 오래.


문창과에 지원하기 전, 영화과 특차 면접에서 똑 떨어진 시네마키즈였던 나였다.

하지만 시나리오 원고를 제대로 본 적도, 써 본 적도 없는 나는!


썼 다.


솥뚜껑을 깨끗이 닦으라고 하면 그냥 열심히 박박 닦았던 것처럼,

그냥 썼다.

면접 장소가 홍대역 바로 앞 유명 개그맨 사무실이라고 하니,

그런 힙한 곳을 구경하러 가는 설렘도 있었겠지. 아무튼 나는 열심히 썼다.




정확히 기억한다.

크리스마스이브,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보낸, 그다음 날이 작품을 들고 가서 면접을 보는 날이었다.

하필 그 해 크리스마스엔 눈이 그렇게 많이 왔다. 이뻤다.

창으로 내리는 눈이 어찌나 밝던지 낮밤을 잠시 잊었던 것도 같다.

그냥 하라는 대로 시나리오를 쓴 건데, 쓰다 보니 이틀을 꼬박 새웠고 A80 여 장을 끝내버렸다.

이런저런 시나리오 용어 거의 없이 마치 소설 쓰듯 빡빡하게,

그렇게 러닝타임 2시간짜리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다 못 썼는데요.


선배는 시놉 한 장을 겉면에 붙인, 한 열 장쯤 되는 너덜거리는 대본을 구겨 들고는 짝다리를 한 채

반항하는 사춘기 녀석처럼 건성으로 대답을 했다.


야, 넌 가. 그리고 다음 너, 그래 너. 이제 우리 작가팀에 들어온 거야. 열심히 잘 써 봐. 수고했어.


선배는 잘리고 나는 붙었다.


젠장, 넌 이걸 왜 다 썼냐.


선배는 의문인지 감탄인지 모를 그 담백한 문장을 남기고 쿨하게 사무실을 나갔다.

죄송하게도 그걸 다 써 버린 나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원고매수로 막내 작가 아르바이트를 거머쥐게 되었다.

선배는 그 이후로도 한참을 영화판에 있었다고 들었다.

그녀만의 시그니처 말보로 레드를 딱 입에 물고, 마치 현장의 영화인처럼 혹은 서부의 사나이처럼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그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다음편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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