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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ive tongue Jun 08. 2022

죽음에 대한 단상

레지던트 일기

병원에서 실습하던 어느 날이었다. 심정지 환자가 응급실로 실려 온다는 문자가 왔다. 코드 블루였다. 2년 차 레지던트가 내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의 불평 섞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1층으로 잽싸게 내달렸다. 금요일 새벽의 정적을 깨우는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곧 들것에 실려 들어오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EMS 요원들이 대기 중이던 의료진에게 짧게 브리핑하고 환자를 침대로 옮겼다. 흉부를 빠른 리듬으로 압박하는 기계가 가슴 위에 둘려져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벗겨내고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심장은 이미 멎은 상태였다. 환자의 가슴에 압박을 멈추면 심전도가 평행선으로 바뀌는 사이클이 반복되었다.


이 광경을 멀찍이 서서 바라보고 있던 나는 소름이 돋았다. 과연 그를 살릴 수 있을까. 산소마스크를 씌운 탓에 얼굴 윤곽조차 보이지 않던 환자는 발가벗은 채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분주한 움직임 속에 배려나 관심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일종의 의무감, 지루함 같은 게 공기 중에 느껴졌다. 응급실을 가득 채운 따분한 기운이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의지를 잠식시켜 버린 듯, 모두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사망시각을 알리라는 담당의사의 지시가 내려진 순간 내가 느꼈던 건 분노였다.


의식이 없는 상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던 애매한 상황. 오히려 빨리 그만두는 것이 미덕이었을까. 그 사람은 도대체 언제 죽은 걸까. 생과 사를 가르는 모호한 경계선이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같이 일했던 Critical Care PA가 중환자실에 올라와서,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누구나 이 침대 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거라고 무덤덤하게 얘기했다. 문득 의식적으로 회피해왔던 나이 듦과 왜소해짐에 대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죽음을 위한 준비는 은퇴 후에 걱정해야 될 것쯤이라 생각했다. 오랫동안 죽음이라는 개념이 실재하지 않는 관념 속에만 머물러 있던 탓이다.


아내가 전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자기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고통을 느끼지 않을 거 같다고 말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건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나오는 고백인가. 아니면 죽음에 대한 무관심의 표현인가.


철학자 강신주도 "어쩌다 어른"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비슷한 말을 했다. 스피노자를 인용하면서 죽음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나의 죽음, 너의 죽음, 그리고 타자의 죽음.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우리가 공감하거나 느낄 수 없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바로 두 번째 죽음, 즉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다. 우리는 서로의 죽음을 아파하고 괴로워한다.


인생을 충만하게 산다는 것에 죽음을 의식함이 포함되어 있다면 매 순간이 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걸 상기하며 날마다 애쓰면서 살아가야 할 텐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인생의 후반전은 '너와 나'의 행복으로 가득 차 있길 바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Bob Goff의 "Love Does"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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