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는 그렇게 가고 가을이는 요렇게 오고
대지의 어머니에게 가을의 시작은 '입추'일지 모르나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체감상 가을의 시작은 '추석'이 기준이었다. 아무리 더웠어도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의 추석에는 늘 긴팔을 입었었으니까 몸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런 공식이 올해 처음으로 깨졌다. 올해 추석 동안 반팔이었으니까.
여름이랑 헤어지려고 이별통보를 했건만 집착을 보였다. 며칠 동안 그리도 집착을 보이던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가버렸고 대신 가을이가 와버렸다. 집착을 보이던 그녀가 사라지니 뭐랄까, 서운하고 아쉽다. 그녀가 사라지니 속이 시원할 만도 한데 이 섭섭함은 무엇일까. 그래도 '안녕'이란 인사말은 남기고 갔더라면 좋았을 걸 아무런 말 없이 그리 가버리니 그래서 섭섭한 것일 것이다.
아침 출근길을 싸늘한 찬 바람이 맞이하니 순간 당황스럽다. 하루아침에 안면 몰수하고 그동안 이별 통보한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낯선 상황이 아직 부적응 중이다.
그래. 널아 함께 하던 그동안 가끔 너의 뜨거운 햇볕에 짜증을 내기도 했고 가끔 열대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며 네 욕도 참 많이 했었던 거 같아. 그때 내가 너무 이기적이기는 했던 거 같아.
그래도 하루아침에 그리 가버리면 아직 옷장 안에서 꺼내지도 않은 가을 옷은 언제 준비하라고 그리 간다니. 가더라도 이쁜 가을 옷 한 벌이라도 장만해주고 가면 좀 좋아.
얼마 전이었어.
어느 날 회사에 어떤 상품을 설명하러 온 사람이 사람들을 모아놓고는 퀴즈를 내는 거야. 무심코 손을 들었고 무심코 내뱉었을 뿐인데 어머나 세상에나. 그게 답이라는 거야. 그러면서 천 원짜리 복권 한 장을 주면서 5억 원짜리라고 하는 거 있지.
그래,
난 이게 여름이 네가 준 마지막 이별 선물이라고 생각했어. 어찌나 고마웠던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지. 그래서 박박 긁었어. 5억 원이 나오면 널 다시 데려오겠노라고 다짐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첫 번째 줄 꽝, 두 번째 줄 꽝, 세 번째 줄 꽝....
천원은 순식간에 쓰레기가 되어 갈기갈기 찢어졌고 이내 쓰레기통으로 향하고 말았지. 차라리 천 원을 그냥 주지 그랬니. 5억이 될 거라는 거짓말로 나를 몽롱한 기대감에 빠지게 했어야만 했니?
그래 가버려라. 가다가 발병이나 나버려라.
난 가을이랑 손 마주 잡고 잘 놀 거야.
그런데 말이야.
가을이 얘는 좀 이상한 거 같아. 주변에 이상한 얘들만 데리고 다니는 거 같아.
아침 출근길에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과 마주쳤어. 근데 체격도 머리스타일도 얼굴 윤곽도 아무리 보아도 남자임에 틀림없었는데 말이야, 핫팬츠에 스타킹을 신을 거야. 잘못 봤나 싶어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다시 봤는데도 나의 레이다는 그가 정확히 남자라고 답을 내리고 있었어. 얘 뭐니?
출근하고 나서 잠시 당이 당겨 커피점을 향하는데 눈 앞에서 희한한 사람이 뛰어가는 거야. 키 작고 배 나온 땅딸막한 아저씨였는데 아 글쎄 머리가 변발인 거야. 아 왜 그 있잖아. 청나라 시대 때 머린데 머리 다 박박 밀었는데 꽁지에서 약간 뒷머리 부분만 남겨둔 그런 머리말이야. 뭐지? 나 타임머신 탄 건 아니지? 오늘 왜 이러니.
엘리베이터를 탔어.
같이 탄 여자분이 같은 층 버튼을 눌러주시는 거야. 그래서 그분도 같은 층에서 근무하시는 분인가 보다 했어. 층에 다다르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지. 그런데 이 아가씨가 안 내리는 거야. 나만 내렸어. 뒤를 바라봤는데 문이 닫히는데 안 보이는 거야. 어 이거 뭐야 뭐야? 한 여름도 다 지나갔는데 귀신인 거야? 설마.
아, 그리고 하나 고백을 하자면 말이야.
사실은 당이 당겨서 커피점으로 향했던 건 아니었어.
사무실 여직원이 내 옆자리 남직원 책상 위에만 커피를 놓고 가더라고. 뭐지 뭐지? '나도 입인데', '나도 살아있는 생물인데'라고 말하고 싶었어. 그래서 커피점을 다녀온 거였어. 그러고 보니 나도 참 이상한 애 같아.
가을이 넌 주변에 이상한 사람뿐이구나.
올해 가을이는 심심치 않아 좋겠다.
아, 커피 참 시원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