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쌍피

범인은 현장에서 잡는 게

by 생각하는냥

눈 앞이 흐려지더니 이내 선명해졌다.

마스크 밖으로 새어 나온 입김 탓에 안경에 김서림이 반복한다. 차디찬 바람 탓에 점퍼 모자를 눌러쓰고 미세먼지 탓에 마스크를 착용하고 여느 겨울날과 마찬가지로 중무장을 하고는 아침 출근길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멀리 신호등 녹색 불이 들어오고 우르르 인파가 쏟아져 내려온다. 그들을 피해 인도 아래로 내려가 걷는데 오늘따라 차들이 인도 가까이 오는 탓에 인도로 올라섰다. 그때 중무장한 탓에 좁은 시야로 웬 처자 하나가 코뿔소와 같은 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충돌을 예상하고 먼저 피했는데 이 범상치 않은 여인은 피하는 거 없이 진격을 하더니 기어코 이어폰 줄을 잡아당기고 말았다.


어찌나 세게 잡아당겼던지 착용하고 있던 이어폰과 마스크가 귀에서 떨어져 나갔다. 잠시 이 무지막지한 여인네와의 충돌에 멍 때리다가 뭐 별일이야 있겠어 싶어 가던 길을 다시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을 들으려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알고서야 별일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도 설마 하며 이어폰 줄을 당겨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줄은 끊어져 있었다. 뒤돌아 쫓아가 본들 자세히 보지 않아서 누군지도 모른다. 게다가 인파도 많았으니 잡아낼 방법은 없다고 봐야 한다.


속상한 마음 뒤로 하고 사무실에 들어와 중무장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마스크 줄도 끊어져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뿔싸 일타쌍피로구나.


이쯤 되면 현수막이라도 걸어서 반드시 범인을 잡아내야 하는 걸까?


사고가 나면 범인은 현장에서 바로 잡아야 한다. 그냥 신분 조회 없이 순순히 보내는 건 2가지 의미다. 이미 가버린 너와는 안녕 굿바이가 하나고 다른 하나는 이미 용서를 했다는 거라서 다시 잡아다가 잘못한 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기도 늦은 것이다.


그래도 휴대폰의 이어폰 잭까지 망가지지는 않은 건 불행 중의 다행이다. 요만큼의 긍정 에너지가 티끌이라도 남아 있어 다행이다.


애써 마음 잡고 있는데 경영지원을 담당하는 여직원으로부터 톡이 왔다. 휴가를 다 사용하셨으니 어제 제출한 휴가는 반려를 하겠다는 거였다. 아니, 당신이 휴가 남아있다고 해서 올린 건데 이제 와서 없다고 하면 나는 어쩌라는 거야.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 없이 'ㅎㅎ.. 반려하겠습니다 ㅠ'라고만 보내왔다.


ㅎㅎ <== 얘는 비웃는 거 맞는 거 같고

ㅠ <== 그런데 얘는 뭘까. 비웃어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좀 비웃겠다는 거 같다.


그래서 어쩌라고.


모 유명한 무협지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남긴 유명한 마지막 유언이 떠오른다. '예쁜 여자를 믿지 말라.' 그런데 오늘의 이 가해자들은 예쁜 여자는 아니다. 그래서 이 말을 조금 바꿔보려 한다. '너 오늘 여자 조심해라'라고. 소소하게 딱 오늘 하루만 그리 바꿔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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