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복

눈밭에서 뒹굴어도 될 내복

by 생각하는냥

대한민국의 내복 변천사가 어찌 되었건 간에 소비자의 한 사람으로서 짐작컨대 우리나라 내복 문화의 급변을 가져온 것은 아마도 유니클로의 히트텍 영향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이전의 대한민국 내복은 입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따뜻하기는 오지게 따뜻하다. 그런데 바지 2개를 껴입은 듯해서 내복 때문에 바지가 잘 느껴지지 않아 마치 바지에 실수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노노 제팬의 바람으로 국내 브랜드 대체 상품을 접해보니 옛날보다 훨씬 좋아졌다. 일단 보풀이 없고 정전기도 없으며 따뜻한 데다 신축성까지 좋으니 이 좋은 걸 여태 왜 안 입었을까.


문득 아버지 생각에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살아 계실 적 같았으면 어머니가 다 챙기셨을 터인데 어머니 돌아가신 이후로 사신 옷이 거의 없을 것 같다. 옷 사는 것에 관심도 별로 없으시니 아마 그 전 옷들 그대로일 것이리라.


"아버지, 내복 사드리려고 하는데 원하시는 거 있으세요?"


"난 소변구 있는 거 사야 된다. 습관이라서 없으면 안 돼."


습관대로라는 게 겨울 내복을 말씀하시는 거 같았다. 일단 내가 가지고 있는 기능성 발열내의에는 소변구가 없었다. 얇은데 소변구가 있는 게 있으려고. 그러니까 아버지가 말씀하신 습관적인 내복이라 함은 겨울 내복을 말하는 거라 생각했다. 인터넷 한 쇼핑 사이트에서 관절 부분을 이중 처리했다는 질 좋은 걸로 애써 골라 주문해드렸다.


(소변구라는 명칭이 좀 어색하고 이상하기는 하나, 쇼핑몰 고객센터에 전화해 물으니 앞 구멍을 소변구라고 칭한단다. 그러니 명칭이 좀 어색하고 이상해도 정확한 명칭이니 어색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난 주말 전화가 왔다.


"네. 아버지. 내복받으셨어요?"


"응. 그래. 받았다. 근데 이거 입고 눈밭에서 뒹굴어도 되겠더라."


이건 칭찬일까. 아니면 불편하다는 것일까?


"네? 옷이 이상해요?"


"내가 입는 건 얇은 건데 이건 두꺼워서 엄청 추운 날에나 입어야겠어. 네가 기능성 발열내의 얘기하길래 그거 고르는 줄 알았지."


"아, 그건 소변구가 없거든요. 그리고 아버지가 입던 것만 입으시는 거 같아서 겨울 내복 말씀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래. 나중에 추운 날 입으련다. 어쨌든 고맙다. 잘 입을게."


변화보다는 늘 익숙한 거만 사용하시느라 옛날 꺼만 고집하실 줄 알았더니 그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습관대로만 사시나 싶었더니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편하면 좋으면 새것도 받아들이셨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과거에만 머물러 계신 줄 알았더니 너무 몰랐는가 보다.


그러고 보니 폰도 갤럭시 9를 쓰고 계시니 아마 조금 더 늦게 개통하셨더라면 10을 쓰고 계시면서 아마도 나에게 이랬을 것 같다.


'9 써? 난 10 이여."


그나저나 사드린 겨울 내복이 제 기능을 발휘할 그 날이 빨리 와야 할 텐데 말이다. 하루빨리 눈밭을 뒹구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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