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우리 만나게 될 그날까지 안녕!
고담시에선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서치라이트를 밤하늘에 비춰 배트맨을 부른다. 그리고 우리 집에선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아내의 목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진다.
둘의 차이점이 있다면 배트맨은 바로 달려가지만 난 볼일 다 보고 간다는 차이점이다. 그래서 처음엔 곱디곱게 오빠 오빠 부르다가 그분께서 열이 받으시면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석자를 고래고래 질러대며 부르신다. 그 타이밍이 되면 하던 일은 무조건 멈추고 달려가야 한다.
불려 간 배트맨은 악당을 모조리 섬멸하는 영웅이지만 불려 간 난 못하는 게 참 많은 불량남편이다.
어제도 불려 갔다. 불려 갈 때마다 뭘 이야기할지 궁금하지만 해결도 못하는 거 뻔히 알면서 부르는 그분도 참 신기하다.
이번에는 잘 보던 TV 전원이 갑자기 나갔단다. 흠! 뜯어본다고 알 수도 없지만 뜯는 것도 모른다. 구 옛날 브라운관 TV 시절에는 옆구리를 두들겨보다 보면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성경말씀처럼 다시 TV가 켜지곤 했는데, 디지털 시대에는 두들기면 더 고장이 날 뿐이다. 수리센터로 A/S 가져가자니 머릿속에서는 이미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가득이다.
순간 입꼬리가 올라가며 미소가 지어졌다. 이참에 쌘삥 TV를 살까? 흐흐
언제나 늘 그렇지만 전자제품을 산다는 건 너무도 설레어 가슴을 흥분시킨다. 쿵닥쿵닥.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취향이긴 하다.
컴퓨터를 켜고 오래간만에 SAMSUNG과 LG를 모두 소환하여 사이즈에서부터 가격까지 쭈르륵 모든 데이터를 수집한다. 그리고 관련 제품들에 대한 후기까지도 수집한다. 대학생 시절 써야 했던 논문을 위해서도 이렇게까지 수집하지 않았을 데이터들이다.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고민 중의 고민 앞에 나 홀로 서게 된다. 이제 어떤 모델을 지를 것인가.
몇 시간의 장고 끝에 그분께 몇 가지 모델을 제시하고 이제 지르기만 하면 될 찰나였다.
다시 오빠 오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모델을 다 정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부르면 어떻게. 게임 속의 소환수처럼 불려져 가니 그분 아주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신다. '갑자기 전원이 들어와.' 전원을 켜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상 작동을 하는 거다.
TV 녀석, 안방에서 잘도 꽈리 꼬고 앉아서는 이제 나까지 가지고 노는 능구렁이 등급에까지 성장한 모양이다.
연기처럼 날아가버린 나의 부푼 꿈이여.
아, 나의 SAMSUNG 이여,
아, 나의 LG여.
내 가족이 되었을 그대여
나중에 우리 만나게 될 그날까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