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비 때문이다.
밤새 내리신 비님 덕에 꿀잠을 잤다. 빗소리 때문에 새벽에 한번 깨기는 했지만 들려오는 빗소리가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원 없이 듣다 어느새 다시 또 잠이 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꿀잠을 부르는 자장가로 빗소리만 한 게 없다.
새벽 내내 내렸으니 아침이면 그칠 줄 알았다. 그런데 출근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비가 계속 내린다. 밤새 꿈나라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던 나의 아군은 이제 적군으로 돌변한다. 걷다 보니 운동화 안으로 틈틈이 비집고 들어온 빗물은 어느새 양말을 서서히 적셔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금세 바지까지 야금야금 씹어먹기 시작하였다.
사무실에 도착해서는 빨래 널기 모드로 전환하였다. 젖은 양말과 신발을 벗어서는 벽에 기대어 서 있게 한 후 선풍기를 틀어주었다. 젖은 바지는 차마 벗을 수 없어서 스스로 인간 건조대가 되어 탁상 선풍기 바람에 몸을 맡겼다. 책상이 완전 고시원이다.
비는 오전 내내 내리는가 싶더니 점심 즈음되니 가랑비도 아닌 것이 비가 그친 것도 아닌 것이 애매하게 몇 방울 흩날리듯 지저분하게 날렸다. 언제 비가 다시 내릴지 모르니 당최 건물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직장 생활의 꽃인 점심시간을 건물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건 불행이며 재난이다.
그래서 종일 일만 할 줄 알았지? 싫어. 일탈할래.
월급쟁이 인생, 일탈이라고 해봐야 뭐 있겠나. 고작 생각해낸 게 병원이다. 식도염 때문에 가던 내과는 이제 약발이 떨어진 듯하여 근처 이비인후과로 향했다.
식도염 때문에 목이 부어 있다 보니 이비인후과로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 같았다. 이비인후과라 역시 다르긴 달랐다. 검사를 하는데 목 깊이 뭔가를 넣어 촬영을 한다며 '히' 소리를 크게 내보라는 게다. 토할 것 같은 느낌에 '히'소리를 크게 질렀더니 어느새 익룡이 되어 있었다. 소리가 점점 더 커지다 보니 금세 어깨에서 날개가 뻗어 나와 펄럭거리며 하늘을 날 것만 같이 익룡의 소리가 목에서 뿜어져 나왔다. 노래방에 오랫동안 가지 못한 한을 여기서 풀고 있다니. 에헤라디야.
의사는 검사할 건 다 해보더니 인후두 역류증이라는 처방을 내렸다. 의사 본인도 걸린 거라며 동지애로 공감을 끌어내려하였다. 이러지 않아요? 그렇죠 그렇죠. 맞아요. 증상이 거의 비슷하였다. 일단 그의 처방을 받아 들었다.
약국에 가서 약을 받으니 전에 내과에서 처방해준 것과는 좀 달랐다. 전에 내과에서 처방을 해주었던 약은 식전에 먹던 약이 있었는데 이번 이비인후과에서 처방해준 약은 반대로 자기 전 30분 전에 먹어야 한단다. 그래서 약사에게 물었다.
- 자기 전 30분을 어떻게 알죠? 나 이때 자야지 하고 30분 전에 먹었는데 안 자면 어떻게 하죠?
순간 익룡에게 잡혀갈 것 같은 당황스러운 표정의 약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곤 대답을 하였다.
- 보통 몇 시 즈음 자나요?
- 12시경에 잘 때도 있고 3~4시경에 자기도 하거든요.
- 그럼 그냥 11시 30분 즈음에 드세요.
- 아, 네.
그냥 처음부터 11시 30분 즈음에 먹으라고 하지. 자기 전 30분을 누가 안다고 자기 전 30분에 먹으래.
그렇다. 그래서 11시 30분 즈음에 약을 먹었다. 그리고 지금 시계는 새벽 2시를 훨씬 넘어 3시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다. 만약 이 질문을 약사에게 하지 않았더라면 여태 자기 전 30분 전을 체크하느라 약도 못 먹고 머리에 쥐 나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야식도 먹지 말고, 기름진 음식도 먹지 말고, 매운 거, 짠 거, 자극적인 거, 카페인 들어있는 거, 탄산 안되고, 그리고 초콜릿도 안 된다고 했는데 병원 다녀와서 싹 다 무시해버렸다.
고깃집 냉면이 먹고 싶다는 아내 때문에 고깃집에 가서 기름진 고기를 구우면서 냉면을 시켰고 게다가 짠 음식인 된장찌개까지 시켰다. 아내가 먹는 냉면도 몇 젓가락질을 하게 해주지 않을까 싶어 달라고는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더니 서너 젓가락질할 만큼의 냉면을 주길래 냅다 받아먹었다.
바보 멍청이 주꾸미 말미잘 같은 녀석, 먹지 말란 것만 골라서 잘도 해치웠네. 그나마 집에 가니 냉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맛이 없어 보이긴 했는데 손이 간다 손이 가. 식도를 타고 잘도 넘어간다. 이 녀석아, 너 식도 고장났다구.
사람은 말이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 하는 동물이 맞는 듯싶다. 앞으로 병원은 하지 말라는 거 말고 긍정적 의미의 해야 하는 것만 알려주면 안 될까? 그런데 말이다. 위에서 먹으면 안 되는 것들 다 빼면 먹을 게 뭔가? 반찬 없이 물에 밥 말아먹는 거 말곤 답이 안 나오는데?
의사 양반, 거 너무 하는 거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