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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냥 Mar 03. 2023

애매한 하루_2

애매한 날에는 움직이는 거 자체가 사건을 몰고 다닌다

그런 날이 있다. 하루 시작이 뭐 하나 이상하면 종일 이상한 일에 엮이는 그런 날. 굳이 신경 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그런 일이 자연스럽게 꼬이는 그런 날. 아무리 주의를 해도 꼬이는 그런 날. 의도가 왜곡되어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는 그런 날.


하루가 '애매한 하루'라는 점괘로 시작되다 보니 가급적이면 덜 움직이는 게 최선인 하루였다. 아니나 다를까 애매하게 안 좋은 일은 꼬리 뒤에 몰래 숨어 있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돼지불백을 주문했는데 왜 두루치기가 나왔을까?


"돼지불백 시켰는데요?"

"네? 돼지불백..."


식당 아주머니는 식탁 위에 두루치기를 놓다가 머뭇거리더니 순간 표정이 복잡해졌다.

본인의 실수를 이제야 알아차린 것일까, 아니면 이제야 알아차린 척을 하며 실은 돼지불백이 귀찮아서 일부러 두루치기를 준 거라는 걸 들킨 것일까, 아니면 두루치기를 처리해야 해서 알면서 일부러 두루치기를 주려고 연기를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의 대한민국 남자들 특징,


"괜찮아요. 그냥 먹을게요."


두루치기를 군소리 없이 맛있게 먹었는데 아주머니는 백 원이라도 깎아주겠다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깎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잘못 나온 음식을 군소리 없이 먹어줬는데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런데 음식이 잘못 나온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다음날 대표님과 함께 간 식당에서 '돼지불백'을 시키시는 게 아닌가. 아주머니의 실수가 아니었더라면 돼지불백을 이틀이나 먹을 뻔했다. 혹시 이 아주머니 시간여행자는 아니었을까.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건 우리였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퇴근길 지하철 안내판에 곧 열차가 들어온다는 메시지가 떴고 서둘러 급히 개찰구를 향해 뛰었다. 카드를 대고 통과하려는데 카드 찍히는 소리는 안 나고 갑자기 차단막이 막아서는 게 아닌가. 본능적으로 급히 멈춰 섰지만 가속도에 의해 차단막을 통과해버리고 말았다.


다시 건너가 카드를 찍으려 했지만 크게 울리는 경고음과 함께 차단막이 막아서니 창피해서 개찰구 입구 쪽으로 건너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상황 자체가 이 얼마나 바보스러운가.


다행히 건너편에 있던 천사같이 생긴 사람이 불쌍해 보였던 건지 바로 카드를 받아서 대신 찍어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들어오는 열차를 향해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말이다. 당황스러워서 차단막을 넘어서지 못했는데 그냥 차단막을 넘어섰더라면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되지 않았던가. 그래도 말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바보 같은 남자를 돕게 하였으니 그는 얼마나 뿌듯한 마음으로 퇴근을 했겠는가.


역시나 애매한 날에는 움직이는 거 자체가 사건을 몰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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