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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냥 Apr 06. 2023

흐린 날엔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비사이로 막가

흐리다.


우산을 챙기고 출근길을 나섰다. 버스를 타려다 지갑 어딘가에 있어야 할 카드가 보이지 않았다. 아뿔싸, 챙겨야지라고 하고선 책상 위에 그대로 놓고 나왔다. 다시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카드를 챙겨서 나와 버스를 타니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버스를 내리고 사람들의 손에 든 우산을 보며 집에 놓고 온 우산이 그제야 생각이 났다. 이렇게 허망할 수가 있나.


교통카드는 반드시 챙겨야만 했지만 우산은 퇴근 시간에 비만 오지 않으면 될 일이라 확률에 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또다시 집으로 가기엔 버겁지 아니한가.


살다 보면 반드시 챙겨야 할 것과 반드시 챙기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반드시 챙겨야 하는 것은 당장 사용해야 하는 것이고, 반드시 챙기지 않아도 되는 것은 확률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쓸모없게 될지도 모를 것을 위해 먼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나름 그래도 봄날씨라 생각했는데 사무실에 도착하니 쌀쌀함이 늦겨울과 초봄의 사이쯤이었다. 좀 참을만하다 싶었는데 점심 먹으러 가기 전, 사무실이 춥다며 대표님이 난방기를 켜고 나가셨다. 굳이 30도까지 맞춰서 사무실을 훈훈하게 만드시겠다니 그러려니 했었다.


점심을 먹고 왔는데 난방기가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찬 바람이 느껴졌다. 이상하다 싶어 리모컨을 확인하니 '30도, 강한 바람'으로 설정이 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냉방'으로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우와, 센스치고는 '따봉'이다. 냉큼 '난방'으로 설정을 변경하고는 "대표님, 난방으로 안 하고 냉방으로 하셨네요."라며 선빵을 날렸다.


소소한 선빵으로 미미한 타격감을 즐기고 있는 나는 어쩌면 대표님의 미움을 먹고 살아가는 늙은 여우과에 속하는 고목나무일런지도 모른다.


심술궂은 조물주의 심경 변화만 없다면 비가 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심술궂은 이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모양이다. 비가 오고 있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나랑 막가자는 얘기 아닌가. 이미 알고 있기는 하였다. 조물주가 나를 막 대하는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 비사이로 막가거나 제일 만만해 보이는 우산 속으로 고개를 불쑥 들이미는 수밖에? 설마 웃는 얼굴에 신고는 안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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