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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냥 Apr 14. 2023

출근의 또 다른 목적

마트습격사건

한밤중에 배가 고파 마트를 습격하였다. 마트습격사건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웬만하면 거의 참는 편인데 살다 보면 아주 가끔 흔하지 않게 욕망을 참지 못해 벌어지는 흔치 않은 일이다. 셈을 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두어 달에 한 번 즈음일 것 같다.


사다 보니 적당히 혹은 조금 넘치게 20L 쓰레기봉투가 과일, 과자, 아이스크림 등으로 금세 채워졌다. 먹고 싶은 걸 빼고 샀는데도 봉투가 채워지는 건 정말 신기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며칠은 먹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먹고 먹고 또 먹다 보니 이틀 만에 동이 나 버렸다. 먹은 것도 없는데 싹 다 사라져 버렸다. 혹시 영화처럼 집안에 노숙자라도 숨어든 것은 아닐까? 어쩌면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강아지의 만행일지도? 그 많던 과자는 누가 다 먹었단 말인가.


마트습격 이틀째 날 자정이 다 된 시간의 봉투 안을 들여다보니 외로이 새우깡 하나가 생존신고를 알려왔다. 순간 CPU가 과열을 일으키며 몇 안 되는 상황을 계산하기 시작하였다. 조만간에 아내도 과자를 찾을 게 분명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탐욕덩어리 악마가 달콤하게 속삭인다. '저건 네 거야. 다 먹어도 돼.' 보통 이쯤 되면 다른 쪽에서 천사의 속삭임도 있어야 하지만 이미 내 안에 천사란 없다. 오로지 직진이다.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 봉투 안에 조심스럽게 손을 넣었다. 방안에 있는 아내가 비닐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 소음을 죽여가며 겨우 새우깡을 꺼내 들었다. '자 이제 이건 제 겁니다.' 사악한 미소가 가득하였다.


새우깡을 납치하여 다른 방으로 숨어들었다. 방문을 닫고 넷플릭스에 접속하여 평소 같으면 보지도 않을 드라마를 재생시킨 뒤, 비닐을 뜯었다. 비닐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새우깡들이 앞으로 이동해야 할 숙주의 몰골이 드러나자 웅성대기 시작했다. 숙주의 야만스러운 손이 거침없이 새우깡을 한 움큼 쥐어 들었다. 숙주의 사냥이 마무리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과자든 뭐든 확실히 뺏어 먹는 거랑 몰래 먹는 게 가장 맛있다. 사람은 확실히 심리적인 동물이다. 같은 음식을 두고도 상황에 따라 맛이 이리도 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뭘 하든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건 분명하다. 물론 경험이라는 게 바탕이 되어 있다면 날개를 단 것이겠지만.


어느새 잠이 들었고 눈을 떠보니 벌써 아침이었다. 개운한 아침의 기지개는 온몸의 긴장감을 풀어 준다. 그러던 중 거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자 다 먹었나? 새우깡이 하나 남았었던 거 같은데?"


모른 척하려다가 아무래도 가만히 있으면 추궁이 들어올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방문을 열고 나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


"응? 난 안 먹었는데? 어제 다 먹은 거 아냐?"


순진하고 착한 아내가 내 말이 곧이곧대로 믿더니 아쉬운 얼굴로 방으로 사라졌다. 2%의 죄책감에 시달리며 바닥에 뒹굴어 다니던 새우깡 비닐을 쓰레기봉투 안 깊숙이 밀어 넣어 마지막 증거를 인멸하였다.


출근을 한다는 건 돈을 벌러 가야 하기 때문에 힘들고 고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집으로부터의 도피처를 제공하기도 한다. 만약 출근이라는 걸 하지 않았다면 곧 새우깡의 존재를 각성한 아내로부터 행방에 대한 추궁을 당하다가 결국 진실을 털어놓고 잔소리와 더불어 실망을 안겨다 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출근을 핑계로 사건 현장을 벗어나니 마음이 편안하다. 이렇게라도 출근이 즐거워지는 날도 있어야 살맛나는 인생 아닐까. 당분간 새우가 들어간 음식은 먹지 말아야겠다. 새우버거, 새우튀김, 새우탕면, 또 뭐가 있지? 어쨌든 이런 거 다 금지다. 당분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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