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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냥 Apr 23. 2023

관종의 탄생

늦었을 때라도 시작하는 건 늦은 게 아닌 거다.

스마트폰 초기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대략 15년 전인가? 트위터 유행이 시작되던 때 200자 내로 글을 쓰는 소규모의 SNS가 있었다. 이름이 '잇팅'이었던가? 그곳은 그저 2030의 감정 소모를 위한 잉여 공간이었다.


그런 곳에 스토리에 유머를 버무려 글을 올리니 단숨에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 어느 누구도 200자 내로 스토리와 유머가 담긴 글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당시 말을 길게 하는 습관이 있어 짧게 하는 연습을 하고자 메모장 느낌으로 이용했을 뿐인데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관종'의 탄생이었다. 


허접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글 잘 쓰는 사람이 올 리 없는 공간이었던지라 사자 없는 공간에서 토끼는 왕이었다.


그런 인기라도 부러웠던 어떤 한 사람이 나를 모방하여 글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도 금세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그의 모방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와 나의 이야기는 서로 달랐으며 내가 좀 더 우월하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이로부터 나와 그의 글이 비슷해서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말을 듣고 좀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은 원조와 모방을 굳이 구별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조와 모방을 따지는 건 원조의 문제일 뿐 독자는 기다려주지도 편을 들어주지도 않았다. 독자의 세계는 은근히 냉혹하였다.


그래서 그날 바로 글 쓰던 스타일을 바꿔 버렸다. 그래도 머리에서 튀어나오는 주체할 수 없는 생각들은 내가 한 수 위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물론 당시의 자신감은 허접한 SNS 공간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 글쟁이 세계에서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었다.


그 허접한 SNS는 어떤 이유에선지 얼마 가지 않아 문을 닫아 버렸다. 


그 이후로 페이스북, 밴드 등을 통해 끄적거려 가며 관종 특유의 굶주림을 채워 나갔다. 그러다 보니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신감과 희망으로 언제든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단어들로 글 하나 쓰는 건 지금보다는 쉬웠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지극히 주관적으로 느끼기에 35세 즈음 시작하여 45세 즈음 사그라들었다. 나이를 들어간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글 하나 쓰려고 하면 순간순간 떠오르지 않는 단어들 때문에 구글링의 힘을 빌리고 있고 그런 순간이 더 많이 늘어가고 있다. 언제든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는 건 이미 과거에 했어야 했을 일이었다. 


모든 건 때가 있다.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할 수 없는 때는 하고 싶어도 못 하게 되는 법이다.


지금의 글쓰기는 그저 몸부림이다. 할 수 없어도 뭐라도 해보자는 몸부림이다. 실패해 봤자 본전이기 때문에 손해 볼 게 없다. 이미 무언가를 했던 적이 없으니 꿈틀거림에 대미지가 들어가지는 않을 것 같다.


좋은 때는 이미 지났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늦은 거지만 늦었을 때라도 시작하는 건 늦은 게 아닌 거다. 뭘 해도 가능한 세상에서 뭐라도 안 하기엔 아까운 세상이다. 최소한 AI가 '글'이라는 세계를 완벽하게 지배하기 전까지는 늦은 것이 늦은 게 아닌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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