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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타미 Jan 03. 2021

불면이 두렵다


잠이 오지 않으면 마음속 두려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단순히 수면 시간이 줄어들어 내일 당장 피곤할 것이 두려운 건 아니다. 생활 패턴이 무너지는 것이 겁이 난다. 생활 패턴이 무너지면 얼마나 사람이 쉽게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는지, 특히나 나란 사람이 얼마나 수면에 영향을 많이 받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덜컥 드는 두려움은 충분한 이유를 갖추고 있다.


항우울제를 먹은 지 일 년을 넘어간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일 년은 넘은 것 같다. 기억이 비교적 선명한 14살, 15살 그때부터 나는 우울을 달고 살았다. 고등학교 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나쁘지 않았거나 무지했고, 대학생 때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악화됐다.


'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라는 영화에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 잘 나타나 있다. 성실한 회사원인 주인공은 매일 아침 도시락을 싸서 출근을 한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일상이고 하나의 루틴이었다. 하지만 우울증이 찾아온 주인공은 도마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다. 매일 같이 하던 일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주인공은 아내에게 가서 말한다. "아무것도 못하겠어. 머리가 아파. 나 죽고 싶어."


도마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주인공은 우울증의 단면을 가장 잘 보여준 장면이다. 매일 하던 일상의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것. 몸 하나를 움직이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것. 세상은 아픈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특히나 정신이 아픈 사람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쏟아진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도시락을 싸는 사소한 일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일 년간 꾸준히 약을 먹었다. 상태는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약의 힘을 믿었고, 또 빌렸다. 약은 제 값을 했다. 나는 이제 그 전만큼 아프지 않다. 삶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 세상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 같은 가치관은 바뀌지 않았지만 우울의 늪에 빠지는 시간은 훨씬 짧아졌고 깊이도 얕아졌다.


약과 함께 평범하게 굴러가는 일상도 큰 도움이 되었다. 12시에서 1시쯤에 자고 8시에서 9시쯤에 일어나는 일상. 그리고 내킬 때면 땀나도록 잠깐 운동을 한다. 혼자 살지 않는 것도 우울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타인의 숨은 가끔은 존재만으로도 나를 살리곤 했다.


규칙적인 수면 패턴과 식사, 그리고 운동은 우울증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기본 요소이면서도 가장 실행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우울은 잠을 못 자게 한다. 우울은 잠을 너무 많이 자게 한다. 우울은 식욕을 앗아가고 식욕을 폭발시킨다. 우울은 어깻죽지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가장 기본적인 삶의 요소들을 빼앗아간다. 악순환은 반복된다. 우울로 인해 일상을 못 지키게 되고, 일상을 지키지 못해 다시 우울하게 된다.


그래서 요 몇 주간의 생활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불쑥불쑥 찾아오긴 했지만, 우울에 빠져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비슷한 시간에 자고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는 것 자체가 안정감을 줬다. 나와의 규칙을 지킴으로써 해냈다는 성취감을 얻었고 성취감은 나를 조금씩 일으켰다.


그래서 잠이 오지 않는 밤은 무섭다. 새벽 세시에 잠들고 낮 열 한 시에 일어나는 삶은 나를 또다시 우울로 끌어들일 것만 같다. 한 번 흐트러진 생활 습관을 바로잡기란 너무도 어렵다. 천성이 게으르고 우울한 나에게는 훨씬 어려운 일이다. 불면이 두렵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무기력하고 우울한 나를 마주칠까 두렵다. 이런 생각조차 없이 편히 자는 밤은 아직 허락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오리라 믿는다.


낮에 깨어 있고 밤에 자고 싶다. 이것만은 지키고 싶다. 이 규칙을 지키지 못하면 무너질까 염려된다. 걱정은 계속해서 잠을 내쫓는다. 아무 꿈도 없는 잠을 자고 싶다. 새벽같이 잠들고 아침처럼 깨어나고 싶다. 불면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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