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만 가득하던 어느 날이었다
바람에 날려온 모래알에 뺨이 베였으면 싶었다
종이보다 연한 칼에 베인 것처럼
뺨에는 얇디얇은 붉은 선들이 그어지길 바랐다
머리칼은 휘날렸고 돌풍이었다
턱 위에 시간을 치고 있는 머리칼들이 어깨 뒤로 넘어갔다
따라 뒤를 돌아 위를 올려봤다
실체 없는 허무가 끈질기게 공기를 메웠다
가볍게 짓눌렸지만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다
허공 길에는 기댈 곳을 찾는 손이 배회했다
무릎을 감싸고 앉는 자세는 그 자체로 서러워서
두 무릎 사이는 앨리스의 방 물 파장이 번져갔다
한숨 같은 어느 날이었다
시의 마지막 문장은 빈 문장이므로 더듬거렸다
텅 빈 손을 쥐어야 하는 날들
나타낼 단어 뱉을 말을 알지 못해
허무는 허무처럼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