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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Dec 17. 2018

영화 인생

드디어 대학 4학년, 직업을 선택해야 할 무렵에는 영화 관련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시나리오 작가도 좋고 영화 기자도 좋았다. 당시 ‘튜브 픽쳐스’라는 영화사에서 시나리오 공모전을 하고 있었는데, 이거다! 싶어서 밤낮 식음을 전폐……는 아니고 잘 먹고 잘 자며 내 눈에는 깐느 황금종려상 급의 시나리오 한 편을 써서 보냈다. 기쁘게도 1차와 2차는 통과했지만 결국 최종 3차의 벽을 넘지 못하고 걸러졌다. “내 스토리 어디 가져다 쓰기만 해 봐! 내가 소송 걸 거야!!” 하면서 눈에 불을 켜고 후속 작품들을 15년 동안 지켜보았지만 엇비슷한 것도 당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냥 나도 이제는 내려놓을 때가 된 거 같다.

수술 전, 아직 맨정신(?)일 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맘껏 해보자고 결심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씻고 나와 극장에 가서 영화 두 편을 연이어 예매했다. 극장 특유의 달달하고 고소한 팝콘 냄새를 폐 속 깊숙이 넣으며 앉아 있다. 월요일 아침부터 날 위해 뭔가 대단한 일탈을 한 기분이었다.




대학교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말간 얼굴이 보송보송했던 에단 호크와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 있나?’ 헉! 소리 나게 이뻤던 위노나 라이더가 나온 <리얼리티 바이츠>라는 영화를 보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담배 몇 개비와 커피, 너와 나 그리고 5달러…”라는 대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영화에 푹 빠져 DVD Plus(디브이디 플러스)라는 비디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의 접점에 있고 싶었다. 손님들이 오면 “영화 추천해드릴까요?” 하면서 쪼르륵 달려와 방긋 웃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눈치 없고 부담스러운 아르바이트생이었다. 한번은 굉장히 앳된 얼굴의 커플이 밤늦게 찾아와 러닝타임이 제일 긴 영화가 뭐냐고 물었다. 이 질문의 핵심은 ‘러닝타임이 제일 긴’이었는데, 나는 ‘물었다’에 방점을 찍고 영화 추천해달라는 그 말이 기뻐서 두 사람을 끌고 다니며 영화를 설명해줬다. 내 기억에 <타이타닉>, <진주만>, <벤허>를 추천해준 것 같다. 커플은 <타이타닉>을 골랐다. 크~ 탁월한 선택이다! 내가 이 영화를 사랑했듯 두 사람도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될 거라 확신했다. 몇 시간 뒤, 영화 관람을 마친 커플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가게를 떠났다. 펑펑 울었구나! 로즈를 위해 희생한 잭이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그 장면에서 울지 않을 사람이 정녕 누구란 말인가! 벅찬 뿌듯함 속에 방을 정리하러 들어갔는데, 쿠션 밑에서 웬 짱짱한 여자 거들이 나왔다. 혹시 더워서 잠깐 몰래 벗었나 싶었는데 여자분은 분명 바지를 입고 있었다. 순간 내 진심이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오래가지 않아 난 DVD Plus를 그만두었다.     


비디오 방이 아닌 대여점에서 일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대학 3학년, 뉴욕 어학연수를 갔을 때였다. 어학원 비용과 왕복 비행깃값, 당장 적응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만 가지고 무작정 뉴욕으로 1년을 떠났다. 먹고 살려면 당장 일을 해야 했다. 여전히 나는 내가 사랑하는 영화의 접점에 있고 싶었다. 단 코리아의 비디오방 문화가 지긋지긋했던 나는 순수하게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는 곳, 그래! 비디오 대여점으로 가자 싶었다.


당시 뉴욕 퀸즈의 ‘퀸즈 비디오’라는 곳에 면접을 보러 갔다. 영어가 익숙하지 않으니 우선은 한인들이 많은 퀸즈에서 시작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파란 눈의 오너에게 내가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는지, 내가 얼마나 성실한 코리안 걸인지 열심히 손짓 발짓으로 어필했다. 그는 분명 내가 마음에 들었다. 곧 연락을 주겠다고 모바일 폰을 켜두라는 시늉을 하며 윙크를 날린다. 됐다! 이 먼 타지에서 내가 해냈구나!! 맨해튼으로 돌아가는 트레인 안에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그 순간만큼은 난 100% 뉴요커였다. 다음날 바로 연락이 왔다. 불합격이었다. 당황한 뉴요커가 왜 떨어졌냐고 물었다. 키가 작아서란다. 데크 위에 있는 비디오들을 꺼내고 정리할 일이 많은데, 키가 작고 힘이 없어 보여서 안 되겠다고 한다. “키는 사다리를 쓰면 되고, 나는 힘이 세다!”라고 말하는데 테잌 케어~하더니만 끊는다. 퀸즈 비디오를 향한 코리안 걸의 드림은 그렇게 무산되었다. (BBDO라는 회사에 입사했을 때, 드디어 내가 ‘비비디오’에서 일하는구나! 했던 기억이 난다.)     


뉴욕에서의 온갖 도전과 시행착오 끝에 ‘A Chris Jun Film’이라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감독의 스크립터 역할이었지만 종종 마이크 붐이나 조명도 거들고는 했다. 한번은 액션이 들어갔는데 조명을 잡은 손끝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거다. 배우들이 감정을 격하게 쏟아내는 신이어서 나 때문에 NG를 낼 수가 없었다. 일단은 이 악물고 참았는데, 아 미치겠다 안 되겠다 쏘리 킬미 싶을 때 딱 오케이가 났다. 그 물집 때문에 한동안 진짜 고생을 했다. 손끝은 스크립터에게는 심장만큼 소중하다. 펜 하나도 제대로 못 잡는다고 감독에게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때가 정말 행복했다.     


이 매력적인 낯선 땅에서 내 힘으로 먹고 살면서 사랑하는 영화를 만드는 일에 조금이나마 동참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침마다 눈이 번쩍번쩍 떠졌다. 한국계 토종 미국인인 감독이자 배우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크리스(Chris)는 매일 나를 성실하게 구박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잘 챙겨줬다. 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야 했을 때, 맨해튼 브리지가 보이는 비싼 레스토랑까지 친히 날 데려가 “너(따위)가 한국 가서 뭐하겠냐. 토익 준비(따위)가 무슨 의미냐 있겠냐. 돌아가지 말고 같이 장편영화 하나 더 같이 찍자”라고 권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뉴욕에 계속 머물렀다면 나는 영화인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뉴욕영화제에 참석한 A Chris Jun Flim 스텝들



튜브 픽쳐스 최종 원고 봉투

드디어 대학 4학년, 직업을 선택해야 할 무렵에는 영화 관련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시나리오 작가도 좋고 영화 기자도 좋았다. 당시 ‘튜브 픽쳐스’라는 영화사에서 시나리오 공모전을 하고 있었는데, 이거다! 싶어서 밤낮 식음을 전폐……는 아니고 잘 먹고 잘 자며 내 눈에는 깐느 황금종려상 급의 시나리오 한 편을 써서 보냈다. 기쁘게도 1차와 2차는 통과했지만 결국 최종 3차의 벽을 넘지 못하고 걸러졌다. “내 스토리 어디 가져다 쓰기만 해 봐! 내가 소송 걸 거야!!” 하면서 눈에 불을 켜고 후속 작품들을 15년 동안 지켜보았지만 엇비슷한 것도 당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냥 나도 이제는 내려놓을 때가 된 거 같다.     


4학년 2학기 때는 그동안 꾸준히 써왔던 영화 리뷰를 모아 작은 책자로 만들어 당시 잘 나가던 M 모 영화 잡지사에 지원했다. 서류를 통과하고 편집장님과 팀장님 면접까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언제 출근할 수 있냐, 같이 잘해보자, 뭐 더 궁금한 점은 없냐는 훈훈한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기분 좋고 당당한 풋내기는 “연봉이 얼마인지 궁금합니다. 아무도 말씀을 안 해주시네요?”라고 웃으며 물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이고 지혜야…’ 싶지만, 그때는 정말 궁금했다.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하고 생계를 당장 책임져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의 급속 냉각은 가히 시베리아 한파 수준이었다. 편집장님이 싸늘한 얼굴로 내 이력서를 한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돈이 중요한 사람은 자기랑 같이 일을 못 한단다. “아…(당황) 아… 당장은 아니어도… (땀 삐질) 아! 그래, 팀장님! 나중에 팀장님 정도 되면 연봉을 그래도 많이 받을 수 있겠죠?”라는 물음에 편집장님 옆에 앉아 있던 팀장님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 한참의 정적 뒤에 편집장님이 안경을 벗으며 신기하게도 턱으로 말한다. “너 나가.” 내가 뭐 잘못했나. 억울한 마음이었지만 돈도 중요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울었다. 무지개 끝에서 결국 내 꿈을 돈에 팔아버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돈도 중요했고 ‘지금의 영화계에서 글로 돈 많이 받기는 힘든 거구나…’ 하는 현실의 깨달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내 영화를 향한 꿈은 진짜 꿈으로만 남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순수하게 영화를 좋아한 외길인생이었다. 지금은 대한민국 수많은 영화 팬 중 한 사람이지만, 그 또한 감사하다. 수술 후에는 당분간 어떻게 될지 몰라도,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렇게 팝콘 냄새에 파묻혀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의 영화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예고편으로 곧 영화의 시작을 알렸다. 오랜만에 소중한 사람을 다시 만난다는 기분으로 영화랑 나랑 설레는 시간을 맘껏 누려야겠다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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